“나는 어른이 되면!” 신이 나서 장래 희망을 말하던 어린 조카가 나에게 물었다. “이모는 어른이 되면 뭐가 될 거야?” “이모는 벌써 어른이지.” “그래서 이모는 뭐가 됐어?” 그러게, 나는 무엇이 된 걸까.
어릴 때는 나이가 더 들면 ‘무엇’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품는다. 특별한 꿈이 없어도 최소한 ‘언젠가는 나도 어른이 돼 있을 것’이라고 쉽게 상상한다. 어릴 적 상상하던 어른은 서툴지 않고, 보다 능숙하고 변화를 훨씬 여유롭게 수용하고 반응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준이라면 나는 여전히 어른이 되지 못했고, 어쩌면 앞으로도 어른이 되지 못할 수 있다. 이미 어른이 됐지만 여전히 어른이 되지 못한 딜레마 속에서 살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어른은 도토리가 참나무로 자라나듯이 씨앗 단계의 인간이 성숙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잘 성장하는 것, 그리하여 인간에게 본래 부여된 씨앗을 잘 발아하는 것이 어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 대로라면 우리는 다른 무엇이 아닌 인간으로 자라나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어른이 된다. 다시 말해 인간이 되면 우리는 어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으로 자라난다는 것은 식물로 자라는 것과 다르고, 도요새, 돌고래, 침팬지 등 다른 동물로 자라는 것과도 다르다. 인간으로 자란다는 것은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을 발휘하며 사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식물 및 여타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만의 특징이 정신적 사유 활동임을 짚는다. 인간은 사태를 근거와 함께 이해하고 심사숙고해 판단하며 자신의 행동을 반성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으로 자라난다는 것은 식물과 같은 생명 활동에만 머물지 않고 동물도 지닌 감각적 욕구에만 끌려가지 않으며, 이들을 이성적 사유와 판단으로 조화롭게 다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인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로서 반드시 공동체 속에서 서로 의지하고 기여하고 상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인간으로 자라난다는 것, 어른이 된다는 것은 공동체 내에서 이성적인 판단을 갖고 상호 관계를 맺으며 다른 구성원과 의지하고 협력하면서 공동체를 함께 구성하고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적 특성을 발휘하며 사는 것, 말이 쉽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아리송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구체적인 행동의 가늠자로 ‘중용’을 제시한다. 예를 들면 비굴하지도 만용을 부리지도 않는 것이 ‘용기’ 있는 행동이며 중용을 지키는 것이다. 중용은 산술적인 중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인간답게 사는 것이 기본이기에, 인간다움을 벗어난 행동에서 중간 단계를 고른다고 중용은 아니다. 또한 중용은 인간다움을 마주한 상황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가장 적절한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선수의 적절한 식사량이 각자의 사정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을 예로 든다. 모든 운동선수에게 무조건 똑같은 양의 밥을 주는 것이 가장 마땅하고, 적절한 행동은 결코 아닌 것이다.
어른의 길에는 정해진 답과 해설지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이 말하는 한 가지는 우리가 매번 어른의 길목에 서 있다는 것이다. 매 순간의 상황과 그때의 나는 다르기 때문이다. 가장 마땅하고 적절한 인간다움이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인지 역시 미리 정해질 수 없고, 그때마다 다르다. 어른되기가 그래서 어렵다. 어른은 결코 종료형이 아니다. 우리는 매 순간 계속해서 어른이 되어갈 길목에 서 있다. 오늘의 어른이 되려면 나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