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헤드라는 이름, 혹시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당신이 만약 1990년대에 음악을 좀 들었거나, 가끔은 음악 바에 가 맥주 한잔하면서 시간을 보냈다면 이 노래를 모를 수는 없다. 그렇다. 라디오헤드의 대표곡 ‘Creep’이다.
‘Creep’의 위상은 엄청나다. 1990년대를 정의한 록 음악을 딱 3곡만 꼽아야 한다면 사람들의 선택은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 오아시스의 ‘Don′t Look Back in Anger’, 그리고 라디오헤드의 바로 이 곡 ‘Creep’일 것이다. 기실 ‘Creep’은 나 같은 라디오헤드 ‘찐’팬에게는 애증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라디오헤드가 발표한 좋은 음악은 차고도 넘치는데 여전히 대중은 ‘Creep’으로만 그들을 소비하려는 경향이 짙기 때문이다.
라디오헤드가 결성된 건 1985년이었다. 데뷔 싱글인 ‘Creep’은 1992년 발매됐지만 초반 반응은 미지근했다. 영국 싱글 차트 78위. 누가 봐도 초라한 성적표다. 심지어 ‘Creep’은 BBC 라디오의 선곡에서 공식적으로 제외되기도 했다. “곡 분위기가 너무 우울하다”라는 게 이유였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Creep’이 부진을 딛고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킬 수 있었을까? 바로 대서양 건너 미국이 구원자가 돼준 것이다. ‘Creep’은 빌보드 싱글 차트 34위, 모던 록 차트에서는 무려 2위까지 올랐다. 이후 미국에서의 성취가 전해지면서 영국에서도 재발매돼 영국 차트 7위까지 오르는 역주행 신화를 일궈냈다.
이렇게 미국에서 히트할 수 있었던 이유, 그건 바로 ‘Creep’이 지극히 ‘영국적이지 않았던 덕분’이었다. 가끔 ‘Creep’을 1990년대 영국 음악을 상징하는 ‘브릿팝(Britpop)’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엄밀히 말해 틀렸다. ‘Creep’은 당시 영국이 아닌 미국에서 유행한 그런지(grunge)·얼터너티브(alternative) 록의 세례를 받은 곡이었다. 무엇보다 ‘지직’ 하면서 수직으로 내리꽂듯 연주되는 기타 연주만 들어봐도 ‘Creep’이 그런지에 영향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지 록 ‘Smells Like Teen Spirit’과 비교해 들어보면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그런지는 ‘먼지’, ‘때’라는 뜻으로 고의적으로 지저분하게 연주하는 록이라고 보면 된다. 얼터너티브는 기존 음악에 ‘대안적’이었다는 뜻이다.
‘Creep’ 이후 라디오헤드는 꾸준히 활동하면서 여러 장의 앨범을 남겼다. 그중 대표적인 노래를 1990년대로만 한정해도 ‘High And Dry’, ‘Nice Dream’, ‘Street Spirit’, ‘Paranoid Android’, ‘No Surprises’, ‘Let Down’, ‘Karma Police’ 등 최소 10곡은 거론해야 할 정도다. 이 곡들, 꼭, 부디, 제발, 찾아서 감상해 보기 바란다. 만약 라디오헤드를 ‘Creep’으로만 알고 있었다면 놀랄 거라고 장담한다.
라디오헤드는 40년에 달하는 활동 기간을 통해 음악 역사상 가장 다채로운 장르 탐험을 일궈온 밴드이기도 하다. 그런지·얼터너티브로 출발해 2집 (1995년)에선 서정미 넘치는 록을, 최고 걸작으로 인정받는 3집 (1997년)에서는 당대를 넘어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탁월한 진보적인 록을 들려줘 격찬을 이끌어냈다. 이후에도 록을 떠나 일렉트로닉을 본격적으로 실험하는 등 언제나 시대를 앞서가는 음악으로 충격을 던져줬다. 뭐랄까. 음악 마니아들에게 그들은 생물학적 나이와는 무관하게 영원히 늙지 않을 것만 같은 밴드다.
나도 알고 있다. 2000년대 이후의 라디오헤드는 음악을 깊게 듣지 않는 사람이라면 어려울 수 있다. 그렇다면 위에 적은 곡들만이라도 쭉 한번 들어보기 바란다. 조금도 어렵지 않을 거라고 확언할 수 있다. 진심으로 강조하고 싶다. 라디오헤드의 세계는 ‘Creep’ 한 곡으로 재단하기에는 너무나 깊고 또한 광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