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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정여울의 나란히 한 걸음런던의 매혹, 여행자를 부르는 손짓
정여울 작가 2023년 07월호



매우 사랑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를 긴장하게 만드는 도시가 있다. 바로 런던이다. 높은 물가와 복잡한 교통과 흐린 날씨, 좁은 숙소와 붐비는 지하철, 맛없는 음식. 이런 것들이 잠시 런던행을 망설이게 하는 것이다.

그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런던에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매력 포인트가 무궁무진하다. 대영박물관의 장엄한 컬렉션(로제타석, 엘긴마블스, 이집트의 미라들 등등), 대영도서관의 방대한 책들과 기상천외한 소장품들, 버킹엄궁전과 웨스트민스터사원, 도심 한가운데서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거대한 하이드파크와 그린파크를 비롯한 수많은 공원, <레 미제라블>을 비롯한 전 세계의 걸작 뮤지컬을 365일 볼 수 있는 화려한 극장들, 『셜록 홈스』의 온갖 기념비적 흔적들, 셰익스피어가 살던 시대 야외극장을 그대로 재현한 셰익스피어 글로브, 역사를 움직인 인물들의 초상화를 모아놓은 런던 초상화박물관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채로운 문화, 예술의 중심이 런던에 있다. 어린이들의 모든 꿈이 담긴 걸작 『피터 팬』의 배경 또한 런던이고, <피터 팬>이 최초로 상연된 곳도 런던이다.

“영국은 작은 나라지만 강합니다. 우리에겐 셰익스피어, 처칠, 비틀스, 숀 코넬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해리 포터도요. 축구선수 베컴의 왼발도 있습니다. 물론 오른발도요(웃음).”
영화 <러브 액츄얼리> 중에서


런던에 갈 때 내가 꼭 방문하는 곳은 내셔널갤러리, 대영박물관, 대영도서관이다. 이 세 장소에 가면 런던을 넘어 인류 역사의 대장정을 한달음에 체험하는 느낌이다. 그런 다음 공원을 걷는다. 그린파크, 켄싱턴파크, 하이드파크에 가면 ‘이런 곳에서는 길을 잃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길을 잃어도, 그 어디서나 아름다운 꽃들의 퍼레이드와 새들의 합창소리가 우리를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한없이 공원을 거닐다가 입구나 출구를 가리키는 팻말을 발견하면 얼마든지 길을 찾을 수 있다. 길치, 방향치인 나는 해외에서 여러 번 길을 잃어본 경험 덕분에 이제는 당황하지 않는다. 오히려 길을 잃었기에 비로소 보이는 낯설고 신비로운 풍경들에 매혹된다. 길을 잃지 않았다면 그날의 그 풍경, 그 순간 거기 있던 사람들을 결코 볼 수 없었을 테니.

『피터 팬』의 작가 제임스 매슈 배리는 켄싱턴파크에서 우연히 재미있게 놀고 있던 아이들을 발견했고, 그들과 친해지면서 『피터 팬』을 구상했다고 한다. 바로 이런 우연한 발견, 세렌디피티(serendipity)야말로 여행자의 눈부신 기쁨이다.

런더너를 숨 쉬게 할 공간들
찰스 디킨스는 이렇게 말했다. 공원은 런던의 허파라고. 정말 그렇다. 공원이 없었더라면 런던은 여유 있게 숨 쉴 공간이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다. 런던은 뉴욕 못지않게 세계 최고의 부동산 가격으로 악명 높지만, 다행히도 단위 면적당 공원의 개수 또한 세계 최고 수준이다. 다닥다닥 붙은 런던의 건물들에 조금은 숨이 막히다가도, 아름다운 꽃과 나무가 가득한 공원에 오면 그 모든 스트레스가 확 사라진다.

녹지와 정원, 꽃과 나무에 대한 영국인들의 관심은 실로 대단해서, 서점에 가면 ‘가드닝’ 코너가 가장 눈에 먼저 들어올 정도다. 한겨울에도 꽃과 나무에 관한 책을 찾아보며 ‘내년엔 어떤 꽃을 심을까’ 고민하는 런던 사람들을 보면 마음 한구석이 따스해진다.



이곳의 겨울밤은 매우 긴데, 그 기나긴 겨울밤의 추위를 잊게 하는 것이 바로 책 벼룩시장이었다. 거리 곳곳에 책과 음반과 꽃씨를 파는 간이 서점들이 있었고, 그곳에서 나는 겨울을 견뎌내는 런던 사람들의 끈기를 봤다. ‘윈터 블루스(winter blues, 겨울 우울증)’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일조량이 적고 낮이 유독 짧아 혹독한 계절이지만 그에 비례해 공연과 도서관, 미술관의 힘이 커졌다.

나는 뮤지컬 <레 미제라블>을 비롯해 여러 공연을 관람했고 대영도서관에서 종일 책을 보며 글을 쓰기도 하고,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과 테이트 모던 미술관의 걸작 컬렉션을 감상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기도 했다. 어둠과 추위와 습기를 견뎌내는 이야기의 힘, 예술의 아름다움, 문화의 위력을 느낄 수 있는 여행이었다.

작가 새뮤얼 존슨은 런던에 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런던에 지친 사람은 삶에 지친 것이다. 런던에는 인생이 감당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 예찬 속에는 런던이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조차도 매일 새로운 매력을 던져준다는 함의가 들어 있다.

그런데 또 다른 작가 폴 서로는 이렇게 재치 있는 반박을 한다. “런던에 지친 사람이 반드시 삶에 지친 것은 아닙니다. 주차 공간을 찾을 수 없어서 지친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이런 말에 사람들이 폭소를 터뜨리며 공감할 정도로, 런던의 땅값은 비싸고 주차 공간은 부족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말에도 여전히 공감할 것이다. “런던의 거리를 탐험하는 지도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의 열정은 지도에 없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있다. 이 모퉁이를 돌면 무엇을 만나게 될까?”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이 말은 런던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무한한 이야기의 보물창고임을 일깨워 준다. 그에게 런던 거리를 홀로 산책하는 기쁨이야말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행복이었던 것이다.

런던의 역사, 인류의 역사

세상에 완벽한 장소는 없지만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장소의 특징은 ‘그 모든 단점을 따스하게 덮어주는 인간의 마음’이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악명 높은 영국의 ‘안개’에 관해서도 작가 아서 시먼스는 명언을 남겼다. 영국의 안개는 섬세한 화가처럼 이곳을 새롭게 채색하고 있다고. 특히 런던은 안개가 작업할 수 있도록 준비된 광대한 캔버스라고. 안개에 싸인 런던, 칙칙하고 우울하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운 런던은 그 자체로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겨 수많은 영화나 소설의 배경이 됐다.



작가 벤 아아로노비치는 런던 시민이 되는 것은 ‘태어난 장소’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런던에 대한 사랑’으로 결정된다고 이야기한다. “아버지는 런던 시민이 되는 것은 당신이 태어난 곳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히스로공항의 점보 제트기에서 내리고, 여권을 흔들며 출입국 심사대를 통과하고, 지하철을 타고 피카딜리 서커스에 들어설 때쯤에는 런던 시민이 돼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나는 런던이 가진 어마어마한 다양성에서 또 다른 매혹을 느낀다. 런던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무려 300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만큼 많은 이방인이 런던에 와서 살고 있는 것이다. 지난겨울 런던에 갔을 때 나는 ‘해피 라마단’이라는 아름다운 조명 장식이 거리를 수놓은 장면을 봤다. 이슬람의 라마단을 ‘해피 크리스마스’처럼 기념하면서 곳곳에서 문화의 다양성을 축복하고 있었다.

우리가 런던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런던만의 역사가 아니라 인류의 역사이기도 하다. 대영박물관에서 고대 이집트와 바빌론, 로마, 그리스의 유적을 비롯한 수많은 인류의 발자취를 느끼고, 테이트 모던에서는 바로 지금 세계 곳곳에서 창조되는 현대미술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나는 또 ‘다음 런던 여행’을 꿈꾸고 있다. 갈 때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싱그러운 도시의 재탄생을 보여주는 런던의 아름다움이 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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