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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정여울의 나란히 한 걸음추억을 여행가방 삼아 떠난다
정여울 작가 2023년 08월호
 
“텅 빈 해변에서
석양과 함께 외출하는 것은
진정으로 고독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 영화배우 잔 모로


하와이에 와이키키 해변이 있다면 노르망디에는 도빌 해변이 있다. 프랑스 노르망디 도빌은 1966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 <남과 여>의 배경이 됐던 곳이고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속 아름다운 휴가 장면의 배경이 되기도 했으며, 영화 <007 카지노 로얄>에 영감을 준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도빌은 코코 샤넬이 ‘모자’에서 ‘옷’으로 관심을 돌리게 된 첫 번째 장소이며, 자신의 두 번째 매장을 열어 패션업계에서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 만큼 청명하고 푸르른 하늘,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모래가 풍부한 해변의 백사장, 사진으로 바라보기만 해도 왠지 가슴 설레고 들뜨는 기분이 드는 전형적인 휴양도시, 도빌.

‘이상적인 여름휴가’를 떠올릴 때, 우리는 그야말로 새파란 하늘에 은빛 모래가 눈부시게 반짝이는 이미지를 연상하곤 한다. 티끌 한 점 없이 푸르른 하늘과 에메랄드빛 바다, 새하얀 모래가 지친 현대인들에게 손짓하는 그곳.


진정한 휴식, 저마다의 행복

그런데 나는 막상 그런 곳에 가면 어떻게 놀아야 할지 모른다. 수영도 할 줄 모르고, 선베드에 누워 햇살을 즐기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여행이라고 하면 ‘열심히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배우고 느끼는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글을 쓰기 위해 바지런히 움직여야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휴양지에서 한가롭게 여유를 즐기는 것은 이상하게도 어색하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안 하는, 진정한 휴식’이라는 개념이 나에게는 아직도 어렵고 낯설다.

그랬던 내가 도빌에서는 진심으로 ‘전형적인 피서객’처럼 휴가를 즐기고 싶어졌다. 도빌 해변에서 저마다의 눈부신 휴식과 놀이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도빌은 내가 가본 어떤 해변보다 하얗게 반짝이는 백사장을 지니고 있었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그야말로 모래 언덕 속으로 푹푹 빠지는 듯한 그 휘청휘청한 느낌조차 좋았다. 백사장의 모래층이 워낙 두꺼워서,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속도를 낼 수가 없다. 이곳에 가면 햇빛도 무한대, 아름다운 바다도 무한대, 우리가 뛰놀 수 있는 모래도 무한대라는 생각이 들어 그야말로 마음이 한껏 풍요로워진다.

여행이 끝나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여행계획을 짰는지 깨달을 때가 있다. 도빌 여행도 그랬다. 이 아름다운 도빌에서 우리 일행은 마음껏 즐기지 못했다. 내가 일정을 무리하게 짰기 때문이었다. 나는 도빌 시립 미술관도 가고 싶고 다음 여행지인 몽생미셸에 무사히 가기 위해 준비도 해야 하고, 이런저런 밀린 원고까지 많아서 도저히 해변의 여유를 만끽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아름다운 도빌의 해변은 내 머릿속에 마치 문신처럼 선명하게 아로새겨져 지워지지 않았다. “도빌에 하루만 더 있을걸, 아니 이틀만 더 있을걸, 아니 도빌에 한 일주일 머물걸 그랬어.” 나는 혼잣말을 하며 안타까워했고, 일행들은 혀를 끌끌 찬다. “넌 항상 그러더라. 여행하면서도 늘 일하느라 바빠. 그게 여행이니?”

“이게 요새 유행한다는 그 워케이션(work+vacation)이구나, 일하면서 여행하는?” 나는 문득 머쓱해진다. 워케이션, 그런 것은 원하지 않는데. 난 진심으로 ‘바캉스’를 원했다. 바캉스(vacance)는 ‘비움’을 뜻한다고 한다. 나의 원래 자리를 비우고 낯선 휴양지에서 최대한 긴장을 풀고 몸과 마음을 쉬게 하는 것이 왜 이토록 어려울까. 머릿속이 온통 일 생각으로 가득 찼기 때문이었다.

여행 짐을 풀어보니 ‘바캉스룩’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매년 ‘수영을 꼭 배우고야 말겠다’며 다짐해 보곤 했지만, 늘 일에 밀려 뒷전이었다. 온갖 책들과 노트북, 필기구, 카메라, 파일과 전선이 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놀이와 휴식을 위한 준비물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때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명언이 떠올랐다. 여행자를 위한 준비물의 목록은 ‘사물들’이 아니라 ‘기억과 지식’이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항상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것만 소유하십시오: 언어를 알고, 국가를 알고, 사람을 알아야 합니다. 추억을 여행가방으로 삼으십시오.”

정말 그렇다. 아무리 좋은 물건을 가져가도 현지 사정 때문에 사용하지 못할 수도 있고 특히 무겁거나 비싼 물건을 가져가면 잃어버리지 않도록 단단히 챙기느라 여행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게 된다. 그 나라에 대한 지식, 언어 그리고 여행의 추억이야말로 최고의 ‘여행 준비물’이었던 것이다. 내 짐은 더욱 가벼워져야 했고, 굳이 뭔가 준비물을 더하자면 놀이와 휴식을 제대로 즐기기 위한 준비물(수영복이나 비치볼 같은 것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내게 주어진 여행의 쓸모

노트북만 가져가지 않는다면, 무거운 카메라만 가져가지 않는다면, 정말 행복하고 가벼운 여행이 될 것만 같은 기대감이 부풀지만 여행이 곧 취재인 작가의 삶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꿈이다. 하지만 솔제니친의 멋진 조언에 따라 ‘항상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것’, 즉 지식과 감성과 추억만을 잔뜩 머릿속에 넣고 다닐 수 있는 멋진 여행자가 됐으면 좋겠다. 도빌의 아름다운 해변을 마음껏 즐기지 못한 대신, 나의 책 『여행의 쓸모』 표지 이미지로 도빌 해변에서 바캉스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넣게 됐다. 나는 도빌에서 신나게 뛰어놀지 못했지만, 도빌에서 아름다운 한때를 보낸 사람들의 이미지는 영원히 내 마음과 내 책 표지 위에 살아남아 반짝이게 됐다.

도빌에 다녀온 뒤 여행에 대한 생각을 많이 바꿨다. 마침내 인정하게 됐다. 더 많은 것을 구경하고 탐구하기 위한 여행도 좋지만, 때로는 쉼과 놀이가 있는 여행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여행조차 일이 돼버리면 그 아름다운 시간의 의미가 퇴색하기 쉽다는 것을. 존 스타인벡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 세상은 거대한 책이고, 여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책 속의 한 페이지만 계속 반복해 읽는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책 속에서 오직 ‘일상’이라는 한 페이지만 읽고 산다면 얼마나 갑갑할까.

여행지에서는 과감하게 스마트폰을 끄고 오직 나의 몸과 마음으로 그곳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만끽할 수 있는 여유를 지닌 사람이 되고 싶다. 이 세상이라는 거대한 책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다채로운 공간과 시간의 이미지와 향기로 가득 채워 넣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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