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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정여울의 나란히 한 걸음천재들의 향연, 지칠 줄 모르는 예술의 초대
정여울 작가 2023년 09월호


 
예술을 사랑하는 가문이 도시의 운명을 바꿔놓은 곳이 있다. 바로 이탈리아의 피렌체다. 메디치 가문은 수없이 많은 경제적 어려움에 부딪히면서도 피렌체를 예술의 도시로 만드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제는 피렌체의 상징이 된 두오모(대성당)를 축조하는 일, ‘비너스의 탄생’ 등 르네상스 걸작을 그린 보티첼리 외 수많은 예술가를 후원하는 일, 교황은 물론 다른 도시들과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피렌체의 문화유산을 지키고 예산을 확보하는 일, 미술작품을 수집하고 마침내 피렌체시에 기증하는 일까지. 메디치 가문은 예술을 위해 인생 전체를 바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내가 가진 부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는 점에서 메디치 가문은 ‘부가 쓰이는 가장 아름다운 길’을 증언해 준다. 그중에서도 ‘르네상스 시대의 걸작’이자 ‘피렌체를 사랑한 예술가들의 걸작’이 총출동하는 장소가 우피치 미술관이다.

우피치 미술관의 흥미로운 점은 르네상스의 거장들을, 그것도 그들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도시인 피렌체에서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다빈치, 라파엘, 카라바조, 우첼로 등이 남긴 대표작들이 이곳에 모여 있다. 그야말로 ‘별들의 페스티벌’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우피치 미술관에서는 화가별로 ‘같은 주제 다른 그림’을 비교하며 보는 재미가 있다. 예컨대 미켈란젤로의 성모, 라파엘의 성모, 다빈치의 성모, 보티첼리의 성모를 한꺼번에 비교해 볼 수 있다.

미켈란젤로의 성모 마리아는 강인한 근육과 넘치는 생명력으로 가득하고, 라파엘의 성모는 사랑과 인자함이 느껴지는 이상적인 어머니의 아름다움이 담겨져 있으며, 다빈치의 성모는 고뇌하고 방황하는 이미지로, 보티첼리의 성모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성으로 그려졌다. 화가들이 성모 마리아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과 해석뿐 아니라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도 이토록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영원과 아름다움을 향한 눈부신 열정

우피치 미술관 2층이나 옥상에서 피렌체 거리를 내려다보면 단지 건물 몇 개가 아니라 도시 전체를 ‘르네상스의 꽃’으로 만들길 꿈꾸던 메디치 가문 사람들의 열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특히 시뇨리아 광장은 ‘미술관에 들어가지 않고도, 거리에서 르네상스의 걸작을 볼 수 있는 장소’라는 점에서 일종의 ‘열린 미술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피렌체 사람들은 매일 시뇨리아 광장 곳곳을 걷는 것만으로도 예술의 아름다움을, 르네상스의 축복을 그리고 ‘나는 피렌체인’이라는 자부심을 느끼지 않았을까.

이곳은 유럽에서 가장 웅장한 광장 중 하나이며 베키오 궁전, 시청, 메디치의 옛 궁전이 있는 곳이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과 더불어 첼리니의 조각상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인 ‘메두사의 머리를 들고 있는 페르세우스’가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유럽 어느 도시나 조각상이 많지만 피렌체의 조각상들은 더더욱 ‘지금 이곳에 이 인물들이 살아 있는 듯한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 준다. 마치 신의 완벽함을 극한까지 닮아가기라도 하려는 듯, 매 순간 인간의 한계에 도전했던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눈부신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지기 때문이다.

당시의 밀라노가 금융의 중심지였고 로마가 종교의 중심지였다면 피렌체는 명실상부한 예술의 중심지였다. 작가 마크 트웨인은 『마크 트웨인 자서전』에서 피렌체를 이렇게 예찬한다.

“피렌체는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며, 가장 매혹적이며, 우리의 눈과 정신을 만족스럽게 합니다. 태양이 가라앉고, 분홍색과 보라색과 황금빛의 홍수에 익사하고, 모든 날카로운 선을 희미하고 희미하게 만들고, 단단한 도시를 꿈의 도시로 바꾸는 색채의 파도가 피렌체를 압도하는 것을 보는 것은, 우리를 황홀경에 취하게 만드는 광경입니다.”

또 작가 찰스 디킨스는 『돔비와 아들』에서 피렌체의 아름다움을 다음과 같이 그려낸다.

“파도 속의 목소리는 항상 피렌체를 향해 속삭이고 있습니다. 영원하고 무한한 사랑, 이 세상의 경계에 얽매이지 않는 사랑, 시간의 끝까지 넘실거리는 사랑을. 바다 너머, 하늘 너머, 저 멀리 보이지 않는 나라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속삭입니다.”

수많은 작가가 예찬했던 피렌체의 아름다움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느낌은 ‘영원’과 ‘아름다움’을 향한 인간의 눈부신 열정이다.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위해 생을 바치는 예술가들, 그리고 그들을 후원하기 위해 자신의 온갖 재산과 노력을 아낌없이 퍼붓는 재력가들,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비평하고 그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에, 아름다움은 끝내 살아남는다. 

피렌체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나는 ‘영화세트장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로마나 밀라노 같은 대도시는 대부분 구도시와 신도시로 나뉘어 있고 대다수 유적은 구도시에 몰려 있다. 그런데 피렌체는 도시 전체가 문화유적처럼 느껴진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에 시뇨리아 광장을 보는 순간 ‘르네상스 시대로 시간여행을 하는 느낌’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깊이 있게 바라볼 수 있는 곳, 피렌체

누군가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떠나고 싶은데, 어느 도시가 좋을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피렌체를 추천하고 싶다. 자동차나 전철을 타지 않고 부지런히 걷는 것만으로도 도시 전체를 둘러볼 수 있는 곳이 바로 피렌체다.

또한 이 도시에 볼거리가 워낙 많기 때문에 ‘이제 다 봤으니, 다른 도시도 가보고 싶다’라는 식의 장소에 대한 수집 욕구가 생기지 않는다. 깊이 있게 오랫동안 바라볼 수 있는 곳, 일주일을 머물러도 그 시간이 결코 길지 않게 느껴지는 곳이 좋은 여행지다.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가장 로맨틱한 장면 중 하나는 ‘10년 후 피렌체의 두오모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끝내 지켜낸 여주인공의 강인한 의지였다. 우리가 헤어지더라도, 서로를 너무 미워해서 돌이킬 수 없이 싸우더라도, 10년 후에는 피렌체의 두오모에서 만나자는 약속. 그 약속 하나를 지켜 마침내 옛 연인을 만나기 위해 여주인공은 힘겨운 나날을 견디고 또 견뎠다.

사랑을 지켜내기 위해 오늘의 고통을 견뎌내는 힘, 그것은 연인뿐 아니라 예술의 아름다움을 지켜내는 유일한 비결이기도 하다. 그 어떤 르네상스의 거장들도 손쉽게 그 자리에 오르지 않았다. 가난과 싸웠고 알려지지 못하는 슬픔, 인정받지 못하는 고통, 자신의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후원자들의 몰이해, 예술의 아름다움을 인정해 주지 않는 대중의 차가운 시선과 싸웠다.

단번에 정상에 올라 평생 그 자리를 지킨 예술가는 없었으며, 명성을 얻은 뒤에도 ‘또 하나의 새로운 아름다움’을 길어 올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피렌체를 가리켜 ‘방부 처리된 기적의 도시’라고 이야기했다. 아마도 그 ‘방부 처리’란 예술의 아름다움, 건축의 아름다움 그리고 피렌체라는 도시의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땀방울을 흘린 모든 사람의 노력이 아닐까.

피렌체를 가로지르는 아르노강에서 해지는 풍경을 바라본다면, 이 도시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드디어 나에게 맞는 곳을 찾았다는 느낌, 이곳에서 며칠이 아니라 몇 년이라도 살고 싶은 느낌, 더 이상 아름다움을 찾아 헤매기 위해 이곳저곳을 방황하지 않아도 좋은 느낌. 나에게 피렌체는 영원한 토포필리아(topophilia), 장소에 대한 사랑을 가르쳐준 장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