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에 크게 의존하는 우리 경제는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무역통상 환경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할 경우 인구구조 변화로 초래되는 저성장의 함정에서 벗어나기 어려울지 모른다. 인구구조 변화로 노동공급이 제약돼 잠재성장률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상황에서 신규 투자의 확대와 생산성의 증대 없이는 저성장이 고착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근 글로벌 무역통상 여건이 크게 바뀌고 있다. 우선 인공지능, 빅데이터, 스마트팩토리, 메타버스 등 4차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디지털 전환이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다. 2050년경 탄소중립을 실현하겠다는 목표 아래 많은 국가가 에너지 전환, 탄소감축기술, 배터리 분야에 대한 투자를 빠르게 늘려가고 있다. 미중 간 무역 갈등, 코로나19로 인한 보건위기 등으로 공급망 붕괴를 경험한 각국 정부는 비용이 더 들더라도 경제안보 차원에서 공급망을 재편하겠다는 입장이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및 「반도체와 과학법(CSA)」, EU의 「탄소중립산업법(NZIA)」 및 「핵심원자재법(CRMA)」 등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산업정책은 주요국이 반도체, 배터리 등 첨단 분야에서 기술패권을 유지하고 소재, 부품 및 장비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사활을 건 싸움에 돌입했음을 상징한다. 또한 이 싸움은 동맹국 간 통상, 기술 및 정보 협력이 더욱 강화되고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가 출범하는 등 동맹 간 대결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변화된 무역통상 환경에서 우리 경제가 저성장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주력산업의 경쟁력을 유지하는 가운데 신성장동력을 발굴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적·외교적 역량, 기업의 투자와 혁신, 정부의 산업정책 등을 아우르는 최적의 전략적 포트폴리오를 설정하고 모든 경제주체가 원팀이 돼 함께 추진해 나가야 한다.
지난 3월 한일 정상회담이 개최된 이후 양국 상공회의소 회장단 회의 등을 포함해 한일 경제단체 간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다. 최근에는 양국 산업계의 니즈 파악 및 협력사례 발굴을 위해 경제협력 스터디 그룹도 추진되고 있다. 역사, 영토,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 등 정치적·사회적인 측면에서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기술 수준, 자본 축적, 국제적 위상 등을 고려할 때 양국의 경제협력은 무역통상 여건 변화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많은 시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우리나라와 일본은 반도체, 배터리 등 첨단 주력산업 분야에서 수평통합형 분업체계를 만들 수 있다. 소재·부품·장비 측면에서 상호 보완 및 의존 관계에 있는 업종이 많고, 일본이 기초기술에서 우위인 경우 우리나라는 실용화 및 양산화에 강점을 가진 분야가 많다. 또한 단기간 내에 한 나라의 노력만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탄소저감 및 수소 관련 기술개발은 기술수준이 높은 양국이 기술개발과 글로벌 표준화 과정에서 협력한다면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리튬, 망간 등 중요 광물은 우리나라와 일본이 해외에서 공동으로 개발할 수 있겠으며, 액화천연가스(LNG) 등을 공동으로 구입하는 방안도 추진될 수 있겠다.
2019년 이후 한일 간 수출규제 조치는 직접적인 교역 위축 및 해외직접투자 축소를 통해 양국에 손실을 입혔다. 그렇지만 해당 기간에도 일본의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기업들이 우리나라에 진출하는 등 기업 간 협력이 진행된 것은 두 나라 간 수평통합형 분업체계가 효과적임을 방증한다. 앞으로 정치적·사회적 측면의 문제까지 원만하게 해결돼 투자의 불확실성이 제거된다면 한일 양국의 경제협력은 저성장 함정을 피할 수 있는 중요한 발판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