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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독서의 문장들한자에 깃든 커다란 세계를 여행하는 기쁨
김혼비 에세이스트 2023년 09월호


최다정 『한자 줍기』



번역하는 일은 지난한 작업이긴 하지만, 고심 끝에 골랐을 하나의 한자에 응축된 감정을 느낄 때마다 매번 감탄한다. 예컨대 당신을 향한 그리움이 깊다는 마음을 
‘遡’(소)라는 한 글자로 드러낸다. 遡는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의미다. 내가 있는 여기에서 당신이 있는 그쪽으로 자꾸만 거슬러 올라가는 마음이, 그리움이라고 여긴 것이다. -p.114


처음 한문에 흥미를 느낀 건 초등학교 3학년 무렵 오원석 화백의 『따개비 한문숙어』 시리즈를 읽으면서였다. ‘견마지로’니 ‘각골난망’이니 ‘건곤일척’이니 지금까지도 그때그때 기억 속에서 꺼내어 요긴하게 잘 써먹고 있는 사자성어들은 몇 번을 반복해서 읽은 저 시리즈에서 거의 다 배운 것이다. 반면 처음 한자에 매력을 느낀 건 그로부터 1년 뒤다.

(흔히 ‘한자’와 ‘한문’을 혼용해서 쓰는 경향이 있는데, ‘한자’는 개별 문자 하나하나를 지칭하고, ‘한문’은 그런 한자를 갖고 “옛 중국어의 문법에 따라 지은 문장”을 지칭하는 것이므로 따로 구분했다.) 우연히 어딘가에서 귀엽고 익살맞게 생긴 글자 ‘傘’을 보고 궁금해서 뜻과 음을 찾아봤는데 ‘우산 산’이라는 걸 알고 저절로 감탄이 터져 나온 것이다.

아니, 진짜로 너무 우산 같잖아! 어떻게 우산을 이토록 기가 막히게 글자로 형상화했지? 긴 막대(十) 위 지붕같이 처진 막(人) 아래 사람들(人)이 바글바글 비를 피하고 있는 모습을 생생히 담은 이 글자에 나는 완전히 반해버렸다. (한문학을 전공해서 한문학자가 됐다면 우산 산(傘) 자를 문신으로 새겼을지도 모른다.)

그날 이후 옥편을 사서 글자 하나하나의 모양새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한자를 만드는 여러 방식 중 ‘우산 산’ 자처럼 사물의 모양을 본떠 문자화하는 ‘상형’이라는 방식도 흥미로웠지만, 모양이 없는 추상적인 대상을 표현하기 위해 뜻과 뜻을 합쳐 만드는 ‘회의’라는 방식에 깊이 매료됐다. 이를테면 ‘밝을 명(明)’ 자가 해(日)와 달(月), 두 개의 밝은 것을 합쳐 만들어졌다든가, ‘나무 목(木)’ 자를 두 개 연달아 쓰면 수풀이 되고(林), 세 개 연달아 쓰면 ‘빽빽할 삼(森)’이 된다든가 하는 것들. 이 매력에 첫 눈을 틔워준 건 ‘뾰족할 첨(尖)’ 자였다. 그렇지, 아래가 크고(大) 위가 작으면(小) 뾰족해지지, ‘뾰족하다’를 이렇게 압축적이고 명징한 한 글자로 설명하다니, 한자 최고야! 이런 식으로 또 열광했던 것 같다. (한문학자가 됐다면 ‘傘’ 옆에 ‘尖’을 문신으로 새겼을지도. 내가 아직까지 문신을 하지 않은 건 한문학자가 되지 않았기 때문일까.)

이런 나에게, 한자와 만주어를 연구하고 옛날 문헌을 새로이 발굴하는 작업을 하는 (문신은 없는 것 같은) 한문학자 최다정이 54개의 한자 속에 깃든 의미를 자기 고백적인 이야기와 연결시켜 하나씩 꺼내어 쓴 『한자 줍기』는 너무나 고요한 방식으로 역동적이고, 명료한 방식으로 낭만적인 ‘여행지’였다. 그가 조곤조곤 일러주는 한자 속 의미들을 알아갈 때는 물론이고, 그가 공부해 온 동양고전이나 역사서 내용이 함께 섞여 들어와 글자와 이어질 때마다 속으로 작은 탄성을 질렀다. 최다정은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면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곁에 두어야만 한다”라고 했는데, 공부, 특히 한자처럼 우리와 밀접하면서도 낯설고, 커다란 세계가 고도로 압축된 언어를 공부하는 것도 결국 그런 일이 아닐까. 적어도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어떤 세계와 잠깐씩 이어지며 넓어지는 느낌, 그래서 나의 미래를 좀 더 넓은 세계에 갖다 놓는 용기 같은 게 생겼다. 참 근사한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