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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강양구의 과학토크영화 <오펜하이머>는 왜 나왔을까?
강양구 지식큐레이터 2023년 09월호

20세기의 수많은 과학자 가운데 인류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누굴까? 상대성 이론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항생제의 알렉산더 플레밍 등 저마다의 관심사에 따라서 한 번쯤 들어봤던 과학자 여럿의 이름이 생각날 테다. 사실, 나는 답이 있다.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다.

첫 번째는 독일의 프리츠 하버다. 하버는 공기 중에서 질소를 뽑아내는 방법을 처음으로 개발했다. 그 덕분에 화학 비료가 탄생했다. 그 이후로 인류는 가축이나 사람의 똥오줌, 새똥이 굳어서 만들어진 구아노, 초석(광물) 같은 천연 비료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작물의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높일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인류는 굶주림에서 벗어날 길을 찾았다.

하지만 하버는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에 독가스를 풀기 시작한 현대적인 화학 무기의 창시자다. 그의 화학 무기 집착은 그것을 혐오하고 반대했던 아내의 권총 자살에도 무뎌지지 않았다. 결국, 그가 고안한 화학 무기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도 못했을뿐더러 제2차 세계대전에서 유대인 등을 대량 학살하는 독가스로 이어졌다.

바로 여기서 두 번째 과학자가 등장한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미국의 원자 폭탄 만들기, 이른바 ‘맨해튼 프로젝트’를 지휘했던 과학자다. 비범하다 못해 ‘천재 중의 천재’로 칭송받았던 그가 없었다면 미국은 2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원자 폭탄을 개발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다.

오펜하이머와 그의 동료가 개발한 원자 폭탄은 지금으로부터 딱 78년 전인 1945년 8월 6일과 9일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졌다. 그 두 발의 폭탄에 약 20만 명이 사망했고, 생존자 가운데 상당수는 대를 이은 방사능 후유증으로 지금도 고통을 겪고 있다. 더구나 인류는 지금까지 핵무기의 공포에 짓눌린 채 살아가고 있다.

사실 오펜하이머는 원자 폭탄과는 어울리지 않는 과학자다. 1930년대 30대의 오펜하이머는 1929년 대공황 이후 고통받는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며 사회개혁의 필요성에 강하게 동조했다. 미국 민주당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추진한 뉴딜정책의 강력한 지지자였지만, 좀 더 근본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더구나 오펜하이머 주변에는 운명의 연인을 포함해 아내, 동생, 친구, 제자 등 미국 공산당 당원이거나 동조자가 수두룩했다. 미국의 경제 사회 정의에 관심이 많았던 그가 이들과 교류하면서 (당시 미국 사회에서 보기에는) 좀 더 ‘왼쪽’으로 견인되는 일은 자연스러웠다. 그때부터 그는 확고한 ‘좌파 지식인’ 정체성을 갖게 됐다.

따지고 보면, 오펜하이머가 ‘전쟁을 끝내려고’ 또 ‘독일보다 먼저 원자 폭탄을 만들고자’ 맨해튼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역할을 맡은 것도 공동체의 안녕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20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 원죄를 짊어지게 된 그는 끊임없이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결국, 그는 전쟁을 끝낸 ‘영웅 과학자’로 칭송받는 동시에 핵폭탄 반대자로 거듭난다.

원자 폭탄에 이어서 더욱더 강력한 수소 폭탄을 개발하려는 냉전 초입의 미국 군부가 이런 오펜하이머를 그냥 둘 리가 없다. 그는 1954년에 보안 청문회장에 끌려나와 ‘공산당 당원인 적이 없으며’, ‘맨해튼 프로젝트의 기밀 정보를 소련에 넘기지도 않았다’라고 해명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영웅 과학자’는 이렇게 ‘빨갱이 사냥’의 희생양이 돼 몰락했다.

<메멘토>, <다크 나이트>, <인터스텔라> 등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영화 <오펜하이머>를 만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의 절묘한 선택에 감탄했다. 혁명, 공황, 전쟁, 냉전을 거치면서 영광과 몰락을 오간 천재 과학자이자 좌파 지식인 오펜하이머야말로 정말 영화 속 주인공으로 맞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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