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역학이 세상의 이목을 끌게 된 것은 ‘전자의 이중슬릿 실험’에 의해서다. 1927년 물리학자인 데이비슨과 거머는 토마스 영의 1807년 실험인 ‘빛의 이중슬릿 실험’을 개조했다. 개조된 실험이 바로 전자총을 이용한 ‘전자의 이중슬릿 실험’이다. 데이비슨과 거머는 이 실험을 통해 전자가 입자임을 증명하고자 했는데, 실험에서 예상 밖의 놀라운 발견이 있었다.
관찰자 있으면 입자, 없으면 파동 상태에 머무는 전자…
관찰자 효과에 따른 물질의 이중성 발견으로 양자역학 태동
전자를 관찰할 때는 입자가 돼 스크린에 || 자 모양이 맺혔고, 관찰하지 않을 때는 파동에너지로 나타나서 스크린에 간섭무늬(|||||)가 맺혔다. 이런 현상을 양자역학에서는 관찰자 효과(observer effect)라고 부른다. 관찰(observation)에 의해 물질의 성질이 바뀐다는 사실은 기존의 고전물리학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양자역학이 태동하게 됐다.
이것은 우주를 창조하는 가장 핵심적인 원리다. 원자와 같은 양자가 파동에너지의 상태로 우주 공간에 존재하다가 관찰자에 의해서 관측되는 순간에 입자인 존재로 현실세계에 드러난다. 그래서 양자 물리학자 울프 박사는 관찰자 효과를 ‘신의 속임수(God’s trick)’라고 부른다. 관찰자 효과에 의하면, 우주의 모든 양자는 물질(입자)의 형태가 되려고 대기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진동(파동에너지)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미시세계에서 물질과 에너지는 관찰에 의해 언제든지 서로 바뀔 수 있는 것이 된다.
앞에서 살펴본 양자역학의 개념이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에 잘 드러나 있다. ‘어쩌면 시인 김춘수는 양자역학의 원리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자, 이제 김춘수의 ‘꽃’을 살펴보자!
먼저 양자역학의 관찰자 효과가 1연 1행에 정확히 드러나 있다. 1연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은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관측하기 전’과 유사한 상태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객체를 해석하고 인식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단순한 관찰보다 더 상위의 개념이다. 사물의 이름은 세심한 관찰 없이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 창세기에는 태초에 창조주가 아담이라는 인류 최초의 조상을 만들고 나서 에덴동산의 모든 실과에 이름을 짓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작명의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창조주가 인간을 거룩한 창조행위에 동참시키고자 한 것이다.
뒤이어 1연의 2행과 3행은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물질의 파동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3행의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은 이름을 불러주기 전(관찰 전)에는 파동에너지의 형태로 존재하는 양자의 속성을 정확히 표현해 준다. ‘몸짓’은 양자역학에서 설명하는 물질의 파동에너지 상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2연 3행의 ‘꽃이 되었다’는 ‘내’(관찰자)가 인식(관찰)하는, ‘나’만의 의미를 갖는 존재가 된 것이다.
3연과 4연은 양자역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닐스 보어의 ‘상보성의 원리’를 잘 보여준다. 상보성의 원리란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가 실상은 서로를 보완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관찰이 상호 간에 일어나 서로를 보완해 주는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기를 갈망하는 내용이다. 이 세상은 그런 애정 어린 관심에 의해 존재한다는 진리가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시의 마지막 행에서 ‘눈짓’은 1연의 ‘몸짓’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눈짓’은 양자역학의 관점에서는 관측 후 존재이고, ‘몸짓’은 관측되기 전의 파동이다. ‘눈짓’은 관찰의 대상, 즉 사랑의 대상이자 사랑 그 자체다. ‘몸짓’은 사랑을 향한 애절한 기다림을 표현해 준다고 볼 수 있다. ‘눈짓’이 암탉이 알을 품는 사랑이라면, ‘몸짓’은 아직 부화하지 않은 생명의 에너지를 품고 있는 유정란이다. 사랑에 의해 생명에너지가 진동하고 있는 달걀이 부화해 병아리(생명체=의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우주의 모든 양자는 물질의 형태가 되려고 대기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진동들이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눈짓을 갈망하는 몸짓이 아닌가? 물리학자 울프가 “우주의 모든 양자는 물질(입자)의 형태가 되려고 대기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진동들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도 누군가의 눈짓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마치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들이 함께 어울려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주는,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사랑의 ‘눈짓’을 줘야 하고, 사랑의 ‘눈짓’이 돼야 한다. 그런 사랑이 파동에너지를 현실의 의미 있는 존재(입자)로 변화시키며, 그 사랑이 모여 광대한 우주를 운행하고 있는 것이다.
우주는 이렇게 상보성을 가진다. 사랑의 반대말이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한다. 사랑은 필연적으로 관심 어린 관찰을 전제한다. 그리고 우리의 존재는 상호관계성 속에서 관찰(상호작용, interaction)을 통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가상현실인가? 진동하는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 이 우주에서, 우리는 어떤 관찰자가 돼 서로를 바라봐야 하는가? 우리는 각자에게 어떤 의미가 돼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떤 시(詩)로서 이 세상을 노래해야 할까?
지금 우리는 태초부터 우주사를 관통해 온 인간과 창조의 본질에 대한 심오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은 누군가의 눈짓을 기다리는 야생화가 고즈넉이 핀 평화로운 숲속의 오솔길이 될 수도 있고, 갈보리산을 향해 가는 십자가 고난의 여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여정의 출발점에서 우리는 인간과 우주에 대한 사랑의 관찰자로서의 작은 희망과 소명을 발견한다. 그리고 질문한다. 우리의 꽃은 누구이며, 우리는 누군가의 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