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랫동안 눈치를 봐왔지만 눈치의 능력자가 되지는 못했다. 눈치 보는 일은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쓴다는 것이고, 더 파고들면 타인의 시선에 따른 부정적 평가를 신경 쓴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한 가지 기술을 훈련하면 그 기술의 숙련자가 되듯 눈치를 오래 본 만큼 눈치를 잘 채면 참 좋으련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눈치는 보면 볼수록 사람을 미궁에 빠지게 만든다. ‘눈치를 본다’와 ‘눈치를 잘 챈다(눈치가 좋다)’는 같은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눈치를 보면 볼수록, 눈치 있는 행동을 하기는 더 쉽지 않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눈치를 보는 것은 타인을 아무리 고려하더라도 결국은 임의의, 자의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나는 상대가 생각하거나 반응하거나 좋아하고 싫어할 만한 것을 내 마음속에 그려보고, 그에 따라 다시 나의 행동을 평가한다. 하지만 내 마음에 그린 상대의 기분이나 생각이 정말 그가 느끼는 것과 같다는 보장은 없다. 둘째, 눈치 보는 일에는 많은 에너지가 쓰인다. 눈치를 보기 위해 외부 정보 수집에 촉각을 세우고 내 마음속 상대와 비교하기 바쁘다. 나의 마음과 머리는 이미 맹렬히 돌아가고 있다. 따라서 눈치를 보면서 내리는 판단은 이미 시야가 좁아진 채로 내리는 판단이다. 열심히 생각해도 보이지 않고, 아예 고려조차 못 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 시야에 들어온 것만이 풍경의 전부가 아님을, 시야 안을 너무 열심히 들여다보는 사람은 종종 잊게 되는 것이다.
애초에 우리는 왜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일까? 눈치 보는 일에는 타인의 존재에 대한 인정과 공존을 위한 마음이 숨어 있다. 지금 여기에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가능하면 상대와 이 공동체 속에서 잘 지내고 싶은 것이다. 이 자리에 나만 있다면, 무인도에서 나 혼자 산다면, 우리는 굳이 눈치를 보지 않을 것이다. 또 하나, 눈치에는 ‘사전 예방’의 마음이 숨어 있다. 상대의 마음이 상하기 전에, 상대가 부정적으로 평가하기 전에, 미리 행동거지를 조심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째서 사전 예방을 원하는가? 잘 지내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존의 마음보다 사전 예방의 마음이 앞서면 ‘눈치 보기’는 자기 감옥이 되기 쉽다. 그때 눈치의 목적은 다른 사람과 잘 지내기가 아니라, 언제 어떻게 발생할지, 심지어 그 내용이 무엇이 될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문제를 통제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 혹은 관계에서 불확실성을 통제하는 것이 가능한가? 가장 큰 확실성은 변수를 모두 제거하고 과거를 똑같이 답습할 때 확보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일은 가능하지도 않고, 반드시 좋다고 장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 삶이 불확실성과 뗄 수 없고, 이 불확실성이 통제의 대상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은 실존주의 이래 현대철학의 주된 주제다. 우리는 흘러가는 시간과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 속에 불안하게 놓여진 상태다. 그러므로 불확실성은 통제하거나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인생을 살 때 더불어 살아가야 할 필연적 상대다.
눈치를 볼 것인가, 말 것인가? 어느 정도로 눈치를 볼 것인가? 그보다 앞선 것은 ‘무엇을 위해 눈치를 보는지’다. 눈치가 괴로워질 때, 나와 당신 사이에서 균형을 잃은 것 같을 때, 나의 눈치가 최초의 마음인 ‘공존하는 삶’을 충족시키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눈치는 불확실한 인생에도 불구하고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태어난다. 중요한 것은 문제없는 상황을 유지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어째서 눈치를 보는가? 나와 당신, 그리고 인생의 불확실성과 잘 공존하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