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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독서의 문장들‘여성의 몸’에 관한 가장 현대적이고 아이러니한 우화
김혼비 에세이스트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아무튼, 술』, 『다정소감』 저자 2023년 10월호

PT를 처음 받은 건 2015년이다. 그 무렵 나는 축구에 한창 빠져 있었는데, 축구를 더 잘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축구하다가 부상 당할 가능성을 확 낮추기 위해서는 근력을 키우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깨닫고 주저 없이 피트니스 센터를 찾았다. 그리고 금세 맨몸으로 하는 스쿼트나 플랭크는 물론이고 바벨이나 덤벨 같은 전용 운동기구를 사용하는 웨이트 트레이닝의 위력을 알게 됐다. 근육에 과부하를 주는 고된 시간을 꾸준히 견딜수록 없던 근육이 야금야금 붙으며 단단해지는 게 느껴지고, 몇 달 전까진 엄두 못 냈던 무게를 번쩍 들어 올리게 되는 그 정직한 인과. 운동이 힘들수록 머릿속에서 잡념이 저절로 사라지고 오직 현재의 수행에만 집중하게 되는 그 초고도의 몰입. 고작 플랭크 1분을 버텨내지 못하고 플레이트 한 장에 맥을 못 추는 나 자신과 번번이 마주할 때마다 생기는 원초적인 겸허.

코로나19로 인해 사람들과 함께 하는 운동이 2년 가까이 불가능해졌을 때 나를 무력감에서 건져내어 준 것도 피트니스 콘솔 게임 ‘링 피트’로 근육 운동을 하는 시간이었다. 트레이닝이 주는 고된 희열이 어찌나 컸던지 나는 링 피트의 모든 단계를 마스터했고, 한 차원 더 높은 수행을 통해 지금보다 막강한 근력을 품은 근육질의 몸을 갖고 싶은 열망이 커져 언젠가 보디빌딩대회에 출전하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그리고 이것은 이시다 가호가 쓴 장편이자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빛나는 소설 『나의 친구, 스미스』 속 주인공 U노가 보디빌딩대회에 출전서류를 제출하기까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다. 그러니까 이 이후부터 U노가 밟아갈 과정들은 내가 그리는 나의 미래이기도 했다. 그런데 상황은 U노도, 나도 깜짝 놀랄 정도로 우리가 바랐던 것과는 정반대로 흘러간다.


역대 선수들의 사진을 보면 대회 준비가 신체 컨디셔닝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걸 원숭이도 알 수 있었을 텐데. 내 눈은 신기할 정도로 오로지 근육만 보고 있었다. 수행 계획과 기술과 근성을 바탕으로 웨이트 트레이닝만 열심히 하면 승리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었다. 보디빌딩에선 근육이 전부가 아니야. -p.71

약 삼십 평생을 ‘여성스러움’으로 규정되는 미용과 패션에 전혀 관심 없이 살았던, 그래서 강한 근육질의 신체를 단련하는 데에 끌렸고, 그러다가 보디빌딩대회에도 참가한 U노이지만, 무대에서 필수 액세서리인 크고 화려한 귀걸이를 달기 위해 난생처음 귀를 뚫고, 난생처음 제모와 태닝을 하고, 난생처음 화려한 비키니를 사서 입고, 난생처음 피부과에서 필링시술을 받아야 한다. 평소에 적당한 높이의 하이힐도 신어본 적 없는데 이제는 대회 규율 상한선인 12센티미터 하이힐을 신고 걸음걸이부터 손가락 끝 하나까지 ‘여성스럽게’ 움직이며 워킹하는 연습과 미스 유니버스처럼 활짝 크게 웃는 표정연습도 해야 한다. 

사회가 규정한 ‘여성스러움’에서 벗어나고 싶어 도전한 대회에서 극강의 ‘여성스러움’을 강요받고 온갖 미용산업과 연결되는 이 아이러니. 보디프로필의 기묘한 유행에서도 볼 수 있듯이, 현대사회에서 ‘여성의 몸’이 갖게 되는 젠더적 억압은 ‘근육’(으로 대표되는 강한 이미지)을 앞세운 ‘탈여성성’과 교묘하게 결합해서 한층 더 촘촘하게 작동한다는 것을 이 책은 소름 끼치도록 정확하게 보여준다. 이런 혼돈 속에서 U노는 어떤 결정을 할까? 다 읽고 나면 마음 한 편에 단단한 근육이 새겨진 느낌이 든다. 적어도 나의 진짜 욕망을 찾아 들어 올릴 수 있을 만큼의 근력을 품은. 우리의 운동은 여기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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