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작이 가득한 미술관은 여행 후에도 오랫동안 가슴 속에 남아 있다. ‘다시 가고 싶은 도시’를 생각해 보면, 언제나 약방의 감초처럼 미술관이 떠오른다. 이번에는 루브르미술관이나 대영박물관처럼 유명하지는 않지만 해가 지날수록 더 깊은 그리움으로 여행자를 이끄는 세 도시의 미술관으로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다.
패션의 도시로 불리는 이탈리아 밀라노는 미술의 도시이기도 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미켈란젤로의 <론다니니의 피에타> 등 르네상스 걸작들이 포진해 있을 뿐 아니라, 내가 가장 좋아하는 미술관 중 하나인 브레라미술관이 있다. 프란체스코 하예즈의 <키스>는 브레라미술관을 대표하는 걸작인데 로맨틱한 분위기와 아름다운 색채로 가득한 밀라노의 분위기에 유난히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보통 밀라노대성당, 두오모광장,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 등이 밀라노의 대표 관광지로 꼽히지만, 다시 밀라노에 간다면 브레라미술관에 가장 먼저 가고 싶다. 특히 카라바조의 작품 <엠마오의 만찬>과 만테냐가 그린 예수님의 모습(<죽은 그리스도>)은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깊은 울림을 줬고, 작품뿐 아니라 미술관 전체의 분위기가 너무도 조화롭고 아늑했다. 빈에는 클림트의 <키스>가 있고 헤이그에는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고리 소녀>가 있다면, 밀라노에는 하예즈의 <키스>가 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하예즈의 작품은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뭉크의 <절규>를 보고 싶다면
‘그곳에 가면 뭉크의 작품을 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더욱 가슴 설레던 장소가 바로 오슬로에 위치한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이다. 뭉크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질병, 광기 그리고 죽음은 나의 요람을 둘러싼 천사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삶이 끝날 때까지 나를 따라다녔다.”
질병과 광기 그리고 죽음은 마치 영원히 이별하지 않는 삼총사처럼 뭉크를 따라다녔고 뭉크는 평생 그 고통에 시달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들이야말로 뭉크의 예술을 창조해 낸 원동력이기도 했다. 물론 뭉크 자신의 강력한 의지와 노력이 없었다면 고통이 저절로 예술로 승화할 수 없었겠지만….
뭉크의 주변에는 유난히 질병과 광증을 앓는 사람이 많았고, 소중한 사람들의 연이은 죽음이 일어났다. 어머니, 누이, 아버지가 차례로 그의 곁을 영원히 떠나버렸고 살아남은 다른 누이와 그 자신도 병약했으며 우울증이 심각했다. 질병, 광기, 죽음은 항상 그의 가족 곁을 드리우고 있는 옅은 안개처럼 사라질 줄 몰랐지만 그는 그 사라지지 않는 우울과 무기력의 안개를 뚫고 불굴의 의지로 수많은 걸작을 쏟아냈다.
노르웨이의 1천 크로네 지폐에도 새겨져 있는 뭉크의 실제 얼굴보다 우리는 <절규>의 일그러진 자화상으로 표현된 뭉크를 더욱 친근하게 느낀다. 사실은 참으로 무서운 얼굴인데 신기하게도 보면 볼수록 묘한 친근감이 들어 온갖 분장과 코스프레의 콘셉트로도 잘 활용되는 <절규>의 얼굴.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의 <절규>는 루브르박물관의 <모나리자>처럼 그 장소 자체의 아이콘이기 때문에 워낙 사람이 많아 기념촬영조차 하기 어렵다. 나는 기념촬영 같은 것은 포기하고 <절규>, <마돈나>, <사춘기> 등 뭉크의 대표작을 한자리에서 언제든 감상할 수 있는 오슬로 사람들의 행운을 마음껏 즐겨보기로 했다.
책에서 볼 때마다 훨씬 압도적이고 매혹적인 이미지로 살아 숨 쉬는 그림은 <절규>보다도 오히려 <마돈나>와 <사춘기> 그리고 <생의 춤> 등의 작품이었다. 성모 마리아를 인자하고 자애로운 어머니상이 아니라 도발적이고도 관능적인 여성으로 묘사한 <마돈나>, 이제 막 2차 성징이 시작된 소녀가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해 느끼는 공포와 불안을 눈부시게 포착해 낸 <사춘기>, 질투와 의심에 사로잡혀 인생이라는 아름다운 춤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가여운 인간군상들을 그린 <생의 춤>. 이 모든 작품이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에 한데 모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짜릿한 흥분을 안겨줬다.
뭉크는 자신을 시시각각 죄어오는 죽음과 우울의 그림자, 그리고 독특한 그림을 그린다는 이유로 이해받지 못하고 견뎌야 했던 온갖 수모와 모욕감을 참아내고 마침내 ‘예술가의 방’이라는 베이스캠프를 지켜냄으로써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내면의 공간을 창조했다. 그는 자신에게 걱정과 질병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온갖 걱정과 질병이 없었더라면, 나는 마치 사다리 없는 배와 같은 존재가 돼버렸을 것이다.” 고통은 그의 평화로운 일상을 위협하는 장애물이기도 했지만 그는 고통을 통해 살아 있음을 더욱 생생하게 느꼈다.
뭉크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더 이상 책을 읽는 사람이나 뜨개질하는 여인이 있는 실내 정경을 그려서는 안 된다. 숨을 쉬고 느끼며 아파하고 사랑하는 살아 있는 존재를 그려야 한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 그는 ‘고통받는 인간, 고통을 통해 자신의 살아 있음을 느끼는 인간’이야말로 아프지만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우리 자신의 꾸밈없는 모습임을 깨달았던 것이 아닐까.
고흐가 끌어안은 도시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반 고흐 박물관에 찾아가니 역시나 길게 늘어선 인파가 질서정연하게 입장권 구매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박물관 하나만 제대로 관람해도 암스테르담 여행은 전혀 아쉬움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흐 컬렉션은 여전히 감동적이었다.
10여 년 전 다급한 일정 때문에 아쉬움을 뒤로 한 채 급히 떠났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그때를 생각할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던 장면은 고흐의 그림을 처음 실제로 마주했던 그 벅찬 순간이었다. 진로 고민으로 밤마다 머리를 싸매던 시절 나 자신을 위한 위로의 선물로 화집을 샀을 정도로 사랑했던 고흐지만, 그의 <아를의 침실>이나 <아이리스>를 직접 봤을 때의 감정은 감동보다 충격에 가까웠다. 아무리 훌륭한 화집이라도 3차원의 입체에 가까운 고흐의 그림을 결코 재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다시 찾은 고흐의 그림은 뜨거운 감동으로 다가왔다. 이전에는 문화적 충격이 커서 제대로 보지 못했던 그림들을 연대순으로 섬세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9유로였던 관람료가 이제 20유로로 껑충 뛰어올라 잠깐 놀라긴 했지만, 고흐의 가장 많은 그림을 한 박물관에서 편안하게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깝지 않았다. 항상 물감값을 걱정해야 했던 고흐는 노랑, 파랑, 빨강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3개의 색만으로 그 모든 변화무쌍한 색채들을 스스로 만들어냈다고 한다.
<감자 먹는 사람들>을 완성하기 위해 그가 가난한 농부의 가족을 한 사람 한 사람 면밀히 관찰해 그린 습작들 역시 또 다른 감동이었다. 그가 아름다운 그림으로 남기지 않았다면 이 세상 어디에도 기록되지 못했을 한 농가의 저녁 식사 장면은 이제 처연함을 넘어 숭고함으로 다가왔다.
껍질도 제대로 벗기지 않은 감자를 마치 위대한 성찬처럼 소중하게 다루며 사이좋게 나눠 먹는 가족들. 이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뜨거운 삶의 비밀을 조용히 웅변하는 듯한 그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은 그렇게 여러 번 보았음에도 마치 처음 보는 그림인 것처럼 싱그럽고 뭉클한 감동으로 다시 다가왔다.
먼 훗날 암스테르담을 떠올리면 또 다른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을 만한 것은 바로 날씨다. 암스테르담의 날씨는 변화무쌍한 매력으로 여행자들을 반긴다. 화창한 햇살이 온몸을 따스하게 녹여주다가도 금방 천둥번개가 치고 폭우가 내리기도 했고, 언제 그랬냐는 듯 햇살이 내리쬐며 살랑살랑 시원한 바람이 젖은 머리카락을 말려줬다. 미술관이 보이는 거대한 잔디밭에서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사랑스럽게 잠들어 있던 커플의 모습도 암스테르담을 추억할 때 떠오르는 장면의 한 페이지로 남을 것이다.
암스테르담은 고흐를 품은 도시인 줄만 알았다. 다시 가보니 오히려 고흐가 암스테르담을 품고 있었다. 세상 끝의 나락으로 떨어진 고흐,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했던 고흐가 죽어서도 너른 품으로 끌어안은 도시. 그곳이 바로 암스테르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