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2월마다 연말특집으로 크리스마스 선물에 어울리는 만화책을 소개하며 연말 분위기를 내곤 했는데 오늘 소개할 책은 사실 만화책은 아니고 에세이다. 하지만 카스텔라처럼 폭신폭신한 글 사이사이에 귀여운, 너무나 귀여운 그림과 사진들이 카스텔라 위 설탕처럼 커다란 존재감을 뽐내며 달콤하게 콕콕 박혀 있어 연말특집 취지에 더할 나위 없는 책이다. 읽고 나서 “이토록 사랑스러운 책이라니!”라고 외치지 않을 확률은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 확률 정도?(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대하는 분들께 애석한 소식이 되겠으나 11월 1일에 기상청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올해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 확률은 극히 낮다고 한다.)
그렇다고 마냥 귀엽고 사랑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쯤에서 『귀여운 거 그려서 20년 살아남았습니다』라는 책 제목을 한번 되새겨 보자. 20년, 무려 20년이다. 그 긴 세월 한결같이 책을 쓰고 그리며 ‘살아남는’ 일에 굴곡이 없을 리 없다. 아니, 굉장히 험준한 굴곡을 수도 없이 넘어야 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페리테일’이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한 정헌재 작가는, 작가가 되기 전 투고하는 출판사에서 모두 퇴짜를 맞아 암담했던 2년간의 거절과 실패의 시간, 데뷔 후에도 잘되는 때와 잘되지 못하는 때를 끊임없이 오가며 견뎌야 했던 당장 망할 것 같은 불안과 초조의 시간, 평생을 앓아온 아토피와 눈 수술로 정상적인 생활조차 불가능했던 고립과 고통의 시간을 아주 솔직하고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하지만 만약 나였으면 저 시점에서 벌써 포기했을 거라고, 난 이미 완전히 무너져 내렸을 거라고 확신하며 고개를 내저을 때마다, 정헌재는 자신을 거절한 출판사들이 원고를 돌려보내 준 것에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거기서 힘을 얻고, 마음이 부서져 나갈 때마다 일상의 틈새에서 크고 작은 행복들을 찾아내고 수집해서 만든 ‘나만의 회복실’에 들어가 스스로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고장 난 후의 삶’은 어쩔 수 없는 거라 받아들이고 이제 매일 1cm라도 나아질 일만 남았다며 덤덤히 다음으로 걸어간다.
그러니까 이 책은 인생에서 이런저런 최악의 상황을 만났을 때 그를 살려낸 일상의 따듯하고 귀여운 것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가 그만의 따뜻하고 귀여운 시선으로 부정적인 것도 기어이 긍정적인 것으로 바꿔낸 것들의 모음집이다. 그 모음들을 하나하나 따라가다 보면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알려주는 여러 현명한 방법에 가닿게 되고 나만의 모음들을 찾아 나설 여유가 생긴다. 무엇보다 그가 적당히 타협하거나 요령 부리지 않고, 선량하고 다정한 방식으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정말 커다란 용기를 준다.
너무 높게 날지 않아서 떨어져도 죽을 만큼 다치지 않았고 낮게 나는 대신 최대한 힘을 쓰지 않고 딱 쓸 만큼만 써서 빨리 지치지 않았습니다. 낮게 나는 대신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낮게 나는 대신 언제나 원하면 바닥에 발을 딛고 천천히 걸으며 쉬었다 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높이 날지는 못하지만 낮게, 그리고 오래 행복하게 날고 있습니다. -p.369~371
유독 주변에 번아웃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았던 한 해였다. 그래서 긴 글을 읽을 여력조차 없이 녹다운 된 채로 하루하루를 겨우 버티는 이들에게 귀여운 그림들과, 짧지만 속 깊은 지혜가 단단히 박힌 글들로 가득한 이 책을 많이 선물하고 다닌 한 해이기도 했다. 모두 잠시 숨을 돌리고, 크리스마스트리 위 전구들처럼 작고 반짝이는 기쁨들로 영혼을 휘감은 채 연말을 맞이하실 수 있기를 바라며, 한 해를 살아내느라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