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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독서의 문장들제철 음식만 있나, 제철 책도 있지
김혼비 에세이스트 2024년 02월호




김민정 『읽을, 거리』


회사에서 종종 이런저런 기획을 하고 그 세 배 분량에 달하는 다른 사람들이 제안한 기획을 검토하는 입장이다 보니 분야를 불문하고 재기 넘치면서 의미 깊은 기획을 만나면 마치 내가 거기에 참여한 것마냥 가슴이 뛰고 짜릿하다. 난다 출판사에서 2024년에 새롭게 선보이는 시리즈 ‘시의적절’을 만났을 때도 그랬다. 열두 명의 시인이 달을 하나씩 맡아 매일의 기록을 담아내는 책이 달마다 한 권씩 나오는 것으로, “제철 음식만 있나, 제철 책도 있지, 그런 마음으로 시작한 기획”이라는 출판사의 소개를 보고 ‘제철 책’이라는 낭만적인 개념에 바로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지금 내 방 한 켠에는 달마다 챙기면 좋을 제철 음식들이 귀엽게 그려진 ‘제철 음식 달력’이 붙어 있고(제철 음식에 진심이다), 언젠가 ‘제철 술 달력’을 직접 만들어보고픈 잔망스러운 야망도 품고 있었는데(제철 술에는 더더욱 진심이다), 이제 책장도 제철 책들로 채울 수 있게 된다니, 너무 근사한 일 아닌가. 게다가 평소 시인들이 상상력과 언어를 다루는 방식, 무엇이 결국 시가 되고 무엇이 결국 시가 되기 직전에서 멈추어지는지, 그 멈추어진 것들끼리 생각지도 못한 지점에서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서로 만나 어떻게 결국 시 같은 무엇이 되는지에 관심이 많아서 시인들이 쓰는 산문 읽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시의적절’을 죽 따라가는 것으로 2024년 한 해가 하루도 빠짐없이 시인의 말들로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좋았다.

 그렇게 새해 첫 책으로, 너무나 당연한 선택으로 ‘김민정의 1월’이 담긴 『읽을, 거리』를 읽었고,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그냥 이 책을 읽은 것만으로도 이 시리즈에 이미 받을 것을 다 받고 시작하는구나(그런 의미에서 최고의 선두주자였다), 1월의 ‘제철 책’이라고 여기고 읽었는데 이건 두고두고 읽을 ‘사시사철 책’이구나(좋은 책에는 제철이 없다는 진리를 이런 식으로 알려주는 게 이 시리즈의 숨은 큰 그림인지도...?), 그럼에도 1월에, 한 해의 시작에 우뚝 서 있었어야 할 책이구나 생각했다.

 나는 김민정 시인만큼 사랑으로 사람을 새로 빚을 정도로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는 데에 진심이고 뜨겁고 정확하고 계산 없고 바닥없고 편견 없는 사람을 알지 못한다(아마 평생 알지 못할 거라고, 세상에 그런 사람이 또 있을 리 없다고 거의 확신한다). 그래서 그는 늘 눈앞의 사람은 물론이고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의 가장 깊은 속 안까지 들어갔다 나올 수 있는 사람이고 당사자도 보지 못하는 가장 미세한 결까지 다 들여다보는 사람. 그런 사람이 쓰는 글에는 그게 시든, 에세이든, 일기든, 편지든, 무엇이든, 읽자마자 몸속으로 마구 밀고 들어오는 진실된 문장이 가득해서 그것들을 바쁘게 옮겨 적고 보니 그 목록 그대로가 앞으로 매년 매 순간 내가 내 삶에 기울여야 할 노력이고 타인의 삶에 귀 기울여야 할 태도인 ‘살아갈, 거리’들이다. 오직 김민정만이 끌어낼 수 있는 밀도 높은 이야기들이 담긴 네 편(고 박지선, 김화영, 고아성, 황병기와)의 인터뷰와 그가 병상의 아버지와 나눈 대화들을 기록한 한 편의 노트까지도 전부 다.

 이 책을 읽었으니 엄살떨지 말고, 냉소해지지도 말고, 계속 진실되게 사랑하며 사는 수밖에 없겠다. 그리고 올해를 ‘시의적절’과 보내는 수밖에 없겠다. 사실 벌써부터 시인들의 이름으로 달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2월은 전욱진이고 3월은 신이인이다.
 
“근데 경기가 언제야?” “누구?” “누구긴, 그리피스 조이너스지.” “엥? 죽었잖아. 검색해보니까 1998년 9월 21일 사망이야. 이십 년도 훌쩍 넘었어.” “그래? 이상하지, 스포츠 선수는 나이를 안 먹는 것 같아. 멈춰 있어, 거기서.” “거기가 어딘데?” “내가 환호했던 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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