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나는 플라멩코 공연을 보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오랫동안 그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가사도 없는 음악이었고 그 순간에는 춤이 오랫동안 진행된 것도 아니었는데 공연이 시작하자마자 10초 정도밖에 안 된 순간,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나조차도 당황했다. 내가 왜 우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오랜시간이 지나서야 그 눈물의 의미를 깨달았다. 나는 저토록 무언가에 열정적으로 빠져든 적이 없다는 것, 모든 것을 잊고 어딘가에 흠뻑 빠져본 적이 없다는 절망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플라멩코 댄서가 진심으로 부러웠다. 온몸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 무언가에 열정을 남김없이 쏟아부을 수 있다는 것. 어렵고 추상적인 언어가 아니라 한없이 직관적이고 본능적인 ‘몸짓언어’로 자기 안의 모든 것을 표현할 줄 아는 댄서가 한없이 부러웠다.
때로 인간의 몸은 언어를 뛰어넘어 무언가를 표현한다. 플라멩코 댄서의 열정적인 몸짓언어가, 내가 잃어버린 수많은 감수성을 일깨워 준 것이다.
내게 그 플라멩코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준 장소는 바로 바르셀로나에 있는 카탈라냐 음악당이었다. 카탈라냐 음악당은 그 자체로도 많은 것을 속삭이는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이번 바르셀로나 여행에서는 도착하자마자 짐을 대충 풀고 일단 카탈라냐 음악당으로 갔다. 거기서 아무 공연이나 상관없이 당일 판매되는 티켓을 구하고 공연을 볼 예정이었다. 이곳의 프로그램이 항상 훌륭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휘자 주빈 메타와 뮌헨 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공연을 가장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날짜가 맞지 않았다. 다행히 그날 우연히 선택한 공연도 무척 좋았다. 세 명의 기타리스트가 펼친 아름다운 공연이었다. 아무 때나 언제든지 가도 훌륭한 공연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카탈라냐 음악당이다. 오케스트라 공연뿐 아니라 플라멩코, 뮤지컬, 오페라 등 다채로운 공연예술을 관람할 수 있는 아름다운 장소다.
바르셀로나에는 삶을 즐기는 여유가 있다
그다음 사그라다 파밀리아와 함께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구엘파크에 방문했다. 구엘파크의 타일 문양 하나하나는 마치 화가의 섬세한 붓질처럼 정교하기도 하고, 뜻밖의 우연과 코믹한 감성으로 가득한 놀이이자 축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예술과 자연과 놀이는 구엘파크에서 비로소 하나가 되는 것 같다. 도심 속의 자연을 한껏 느낄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면서, 가우디의 예술적 감수성에 흠뻑 젖을 수 있는 곳, 나아가 그 속에서 얼마든지 남녀노소가 뛰놀 수 있는 축제이자 놀이의 공간. 그곳이 바로 구엘파크다.
예술이란 꼭 캔버스 위에 붓질해 미술관에 걸어두는 방식이 아니어도 좋다는 것. 예술이란 구엘파크의 저 사랑스러운 도마뱀 상처럼 직접 만져보기도 하고, 껴안기도 할 수 있는 친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가우디는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나는 바르셀로나 사람들의 여유로움이 한없이 부러웠다. 바르셀로나 사람들은 놀 줄 안다. 나는 바르셀로나 사람들로부터 배웠다. 노는 방법을 안다는 것은 인생에서 큰 축복이라는 것을. 이 사람들은 친구들과 노닥거리는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노는 시간, 흘러가는 시간, 사람들과 여유롭게 노니는 시간을 의미 없게 여기지 않는다.
나는 그 모든 시간을 아까워했다. 일 중독자로 살아온 시간이 너무 길어서 ‘노는 시간’의 소중함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게 친구가 몇 명 없는 결정적인 이유도 바로 친구와 노닥거릴 시간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삶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부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주어지려면 노동시간 축소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도둑맞은 집중력(Stolen Focus)』(2022)의 저자 요한 하리는 한국인의 집중력 저하가 세계적으로 위험한 수준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한국인의 지나치게 긴 노동시간이 집중력 저하의 커다란 원인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바르셀로나는 분명 대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신호등에서 뛰지 않고, 웬만해선 도로에서 자동차 경적도 잘 울리지 않는다. 밤이 되면 식당이나 술집에서 밤늦게까지 맛있는 타파스를 안주로 삼아 수다 삼매경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도 여유롭고 정겹다.
현실의 모습이 지닌 신비와 기적을 포착하길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건설 초기에 오로지 개인 기부에만 의존했기에 건축기간이 점점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건축가 한 사람이 뜻을 세우고,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그 뜻을 실현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의 의견과 자본과 지혜를 모으고, 그 사람이 죽고 나서도 수많은 사람이 그 뜻에 따르며 오직 독창적인 건축물을 짓는다는 일념 하나로 계속돼 온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위대한 도전에 박수를 보낸다.
작가 로버트 휴즈는 『바르셀로나』(2011)라는 책에서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녹은 양초 왁스와 닭 내장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교회”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기괴해 보이는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향해 전 세계 여행자들은 열광적으로 찬사를 보낸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비싼 입장료에도 불구하고 예약을 해두지 않으면 교회 내부 관광은 하기 어려울 정도로 관람자들이 항상 몰려든다.
몸은 언어를 뛰어넘어 무언가를 표현한다. 언어로 구구절절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춤은 끝내 표현해 낸다. 작가 마사 그레이엄은 『블러드 메모리(Blood Memory)』(1991)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음에 거울을 볼 때, 머리카락 옆에 귀가 붙어 있는 모습을 잘 보세요. 헤어라인이 자라는 방식을 보세요. 손목의 모든 작은 뼈를 생각하세요. 그건 기적입니다. 그리고 그 춤은 그 기적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곁의 존재들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몸과 일상까지 당연하게 생각하며, 별로 놀라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머리카락이 자라는 모습, 손톱이 자라는 모습, 어린아이가 태어나 처음으로 걸음마를 시작하는 모습, 엄지발가락이 몸무게 전체를 지탱한 채로 댄서들이 춤을 추는 모습, 새가 그 얇은 날개를 퍼덕거리며 창공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모습, 그 모든 것들이 기적처럼 느껴지는 순간을 예술가들은 기어이 포착해 낸다.
우리를 감탄케 하는 모든 예술작품은 어쩌면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현실의 모습들이 지닌 신비와 기적을 축하하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댄서들은 팔로 우주를 만지고, 발로 음악을 그리고, 온몸으로 시를 쓰는 사람들이다. 그들처럼 우리의 일상도 가끔은 음악처럼 요동치고, 그림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시인의 언어처럼 벅찬 설렘으로 날아오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