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덤(fandom)은 ‘팬(fan)’이라는 단어에 영토나 범위를 뜻하는 접미사 ‘덤(-dom)’을 붙인 합성어로, 특정 대상에 열광하는 팬들이 모인 집단을 말한다. 말하자면 ‘dom’은, 1980년대에 처음 생겨난 뒤 오랫동안 팬들의 집단을 지칭하는 말의 대표 격이었던 ‘오빠부대’에서 ‘부대’에 해당하는 셈이다. 그래서인지 ‘팬덤’이라고 하면 흔히들 아이돌이나 대중문화 속 ‘스타’ 그리고 그들의 팬클럽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이번 호 책으로 고른 『팬덤의 시대』에서 영국 저널리스트 마이클 본드가 다양한 사례를 통해 보여주는 것처럼 팬덤이 존재하는 영역은 만화, 영화, 문학작품, 스포츠, 정치, 예술, 게임, 특정 시대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광범위하다.
‘덕후DNA’라는 표현도 있듯이, 사람들은 저마다의 끓는점을 어느 정도는 타고 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끓는점이 낮기로는 거의 아세톤급인 나는(아세톤의 끓는점은 56.2℃다.) 무언가에 열광하는 빈도도 잦고 몰입도는 굉장히 높고 지속력마저 강해서 10대 때부터 40대 초반인 지금까지 언제나 무언가의 팬인 상태로 살아왔다. 팬클럽이나 정당 같은 특정 집단에 가입해서 활동한 적도 있고(‘팬덤 정치’라는 용어가 생기면서 이 현상이 최근에야 주목받기 시작했지만, 사실 20년 전부터도 이미 팬덤의 역학이 정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크게 작동하고 있었다고 생각하기에 여기에 포함시켰다), 가입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온라인 커뮤니티에 느슨하게 적을 두며 함께 ‘덕질’하는 문화에도 익숙하고, ‘팬픽’ 같은 2차 창작물을 쓰는 데에 한 시절을 불태우기도 했다.
그런 경험들이 취향은 물론이고 가치관과 세계관을 만들어나가는 데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건 말할 것도 없고, 록 밴드 ‘엑스 재팬’과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대한 열렬한 사랑이 나를 일본 회사에 취업하도록, 무협지와 홍콩 느와르 덕질이 홍콩 회사에 취업해 6년 넘게 살도록 이끌었고, ‘찐덕후’들이 즐비했던 ‘미스터리 독서 모임’에서 만난 온갖 책들과 인연은 지난 13년간 아주 소중한 친구로서 책장 한 편과 내 곁을 든든히 지켜주었다. (여기서 만난 가장 친한 친구인 K는 이 장르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아예 일본 미스터리 전문 번역가가 되어 현재까지 100권 넘는 번역서를 펴내며 미스터리에 인생을 바치고 있다.) 그러니까 팬덤이라는 키워드 없이 내 인생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팬덤에서 만난 많은 이들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이렇게 오랜 시간 여러 팬덤을 경험한 입장에서 팬덤을 ‘소속감’이라는 간단한 틀 안에서 분석하는 이 책이 처음에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얼마 전 어느 자리에서 그런 아쉬움을 토로했는데, 그날 이후 ‘하지만 나에게는 이 책이 굉장히 도움이 되었다’는 피드백을 정말 많이 받았다. ‘대체로 비이성적인 집단’ 정도로 여겨왔던 팬덤에 관한 몰랐던 많은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들을 바라보는 입체적인 시선을 처음으로 갖게 되어 좋았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는 글들을 읽으면서 팬덤 경험이 전무하고 생소할 독자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 이 책을 판단한 것을 반성했다. 이렇게 명쾌하면서도 사려 깊게 독자를 낯선 세계로 데려다주는 책은 정말 귀한데.
특히 뭉클했던 것은, 이 책의 에필로그를 읽으면서 처음으로 누군가의 팬덤이 되어볼 가능성을 꿈꿔 보게 됐다고, 그 어느 때보다 무언가를 열렬히 좋아할 준비가 됐다는 글이었다. ‘팬덤’에 대한 책이 이룰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성취 아닐까. 본드가 팬덤에 속해 본 적 없는 과거를 후회하며 쓴 에필로그의 마지막 부분은 다음과 같다.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언제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 또는 누군가에게 빠져들지는 알 수 없다. 다음 기회가 온다면 나는 올인이다. -p.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