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는 2022년 2월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로 달러 부족이 심해지며 기나긴 경제위기의 터널에 들어섰다. 2017년 이후 외환보유고는 400억 달러 수준을 유지했으나, 2022년 3월 한 달 동안에만 외환보유고의 절반에 해당하는 약 200억 달러(외신 추정)의 외국인 단기 투자금이 유출됐다. 환율은 요동쳤고 에너지 및 곡물 가격 상승으로 물가상승률은 30%에 육박했다.
국민의 구매력 또한 빠르게 감소하기 시작했다. 원재료 및 중간재 수입 비중이 높은 산업구조로 무역적자는 계속 악화됐다. 통화가치 하락으로 연간 GDP의 7% 수준이던 재외국민 근로자의 본국으로의 달러 송금도 급감하기 시작했다. 국가 최대 현안은 달러 수급 개선이었고, 정부는 달러 확보를 위해 수입 억제, 달러 해외송금 규제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2022년 12월 IMF 이사회가 30억 달러 규모의 이집트 구제금융 지원을 승인했지만 당장 효과는 없었다. 변동환율제 도입, 보조금 축소, 민영화 추진 등을 골자로 하는 IMF 경제개혁 프로그램 이행이 지연되며 구제금융 지원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았다.
달러 부족에 따른 경제위기는 지난해에도 계속됐다. 지난해 10월 촉발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이집트를 더욱 어렵게 했고, 설상가상으로 예멘 후티 반군이 홍해 해상에서 이스라엘과 관련된 선박을 공격하면서 수에즈 운하 통행 수입이 대폭 감소했다. 모든 상황이 이집트경제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일강은 쉽게 마르지 않았다. 경제위기의 긴 터널 속에서 이집트는 터널의 끝에서 다가오는 빛을 보기 위해 노력했다. 오뚜기처럼 일어서기 위해 경주했고, 비상을 준비했다.
평균 24세의 1억600만 인구가 내수 뒷받침하는 가운데
경제영토 확장, 제조업 육성, IMF 구제금융 확대로 위기 돌파
이집트는 지중해 동남부, 아프리카대륙 최북단에 위치한 국가다. 세계 주요 시장인 EU와 중동 산유국인 걸프협력회의(GCC)로의 접근성이 매우 뛰어나고, 다른 국가에 비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로의 접근성도 좋은 편이다. 더불어 대서양과 인도양을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를 품고 있다. 수에즈 운하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최단 해상교역로로 연간 세계 컨테이너 선적량의 30%, 상품 교역량의 12%, 해상 원유 수송량의 10%를 담당한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이집트는 1990년대부터 광범위한 FTA를 추진했다. 1998년 아랍연맹 17개국을 시작으로 1999년 동남아프리카 21개국, 2004년 EU 15개국, 2005년 이스라엘·미국, 2007년 튀르키예, 2017년 브라질 등 남미 4개국과 FTA를 체결하며 시장을 확장했다.
2023년 기준 이집트의 총인구는 1억600만 명으로 중동 및 아프리카 국가 중 1위이며, 전 세계 기준으로도 14위다. 여성 1인당 출산율이 감소세이긴 하나 2023년 기준 3.1명으로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다. 매년 인구가 200만 명씩 증가하고 있다. 유엔은 2030년 이집트 인구가 1억2,800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인구의 50%가 30세 이하이고, 국민 평균연령이 약 24세라는 점이다. 소비 인구의 급격한 증가가 기대되는 대목으로, 강력한 내수는 이집트 경제성장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것으로 보인다.
경제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이집트의 노력은 거침이 없었다. 우선 수입 규제로 달러 유출을 최소화했다. 이 과정에서 이집트에 제품을 수출하거나 현지에 진출해 공장을 운영하는 한국을 포함한 많은 외국 기업이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이집트는 멈추지 않았다. 달러 확보가 국가경제의 핵심임을 거듭 천명했다.
지난해 8월에는 브릭스(BRICS) 가입이 승인됐고 올 1월부로 정식 회원국이 됐다. 달러 의존도를 줄이고자 브릭스 회원국들과 각국 통화 기반의 무역거래 논의도 진행했다. 중국, 러시아, 브라질 등 전통적 교역국과의 협력 강화와 더불어 국가 주요 현안 중 하나인 식량안보 문제에서 인도 등과 협력을 확대할 수 있는 활로가 생긴 것이다.
동시에 이집트 정부는 전자제품, 석유화학, 철강, 섬유 등을 중심으로 제조업 육성에 박차를 가했다. 제조업은 2022년 기준 이집트경제의 16.8%를 차지하고 있고, 이집트의 제조업 부가가치가 아프리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를 넘는다. 정부는 아프리카 제3국 수출 운임 지원 등 제조업 수출지원 정책을 꾸준히 확대했다. 외국인 투자유치를 통한 제조업 육성에도 나섰다. 이를 위해 2021년 12월 압델 파타 엘시시 대통령이 직접 발표한 골든 라이선스 제도를 2022년부터 본격 추진했다. 골든 라이선스를 획득한 기업은 공장용 설비 수입관세 면제, 과세표준 인하, 토지 매입
비용 50% 할인 등 파격적인 혜택을 받는다. 여러 부처의 승인이 필요한 투자 라이선스 또한 이집트투자청(GAFI) 한곳에서 처리가 가능하도록 했다.
한편 1년 이상 지속된 이집트와 IMF 간 구제금융 확대 협상이 지난 3월 6일 타결됐다. 구제금융 지원액이 30억 달러에서 80억 달러로 늘어났고, 이와 함께 변동환율제가 전격 도입됐다. IMF의 구제금융 확대 조건에는 보조금 축소, 인플레이션 억제, 민간부문 강화 등이 있었지만 최고의 관심사는 변동환율제 도입 여부였다. 2020년 이후 3차례의 평가절하 조치가 있었지만, 달러 부족 상황에서 이집트 파운드화 가치는 속절없이 하락했다. 지난해 12월 암시장 환율은 은행 환율의 2배가 넘는 70파운드까지 올랐다. 시중 은행과 암시장에서의 환율 괴리는 인플레이션 억제에도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단기적 불확실성이 해소되니 외국인 투자금이 빠르게 유입되기 시작했다. IMF와의 구제금융 확대 합의 이후 약 3주 동안 아랍에미리트(UAE)의 라스 엘 헤크마(휴양지) 투자개발금, EU의 양허성 차관, 세계은행 지원금 등으로 530억 달러 이상의 달러 유동성이 확보됐다. 이집트 경제개혁에 대한 기대감에 시장은 곧바로 활기를 되찾았다. 오랫동안 중단됐던 이집트 기업의 대금 결제도 빠르게 이뤄졌다. 정부의 결정에 시장이 반응한 것이다.
내년 한·이집트 수교 30주년 계기로 경제협력 확대 기대
이집트는 경제적 관점에서 우리에게 다소 생소하나 사실 한국과 이집트의 경제협력은 조용하지만 굳건한 토대 위에 진행되고 있다. 2012년 이집트에 진출한 삼성전자는 현재 TV, 태블릿PC, 휴대폰을 현지에서 생산하고 있으며, LG전자는 1990년대 초부터 TV, 세탁기 등을 생산하고 있다. 2022년 1월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K9 자주포 패키지 수출 및 현지생산 계약을 체결했고, 한국수력원자력은 2022년 8월에 3조 원 규모 엘다바 원전 구조물 건설 프로젝트를 수주했다. 또 현대로템은 이집트에 전동차를 납품하고 있다. 이렇듯 전자제품, 방산, 원자력, 철도 등 부가가치가 높은 이집트 정부의 역점 사업에서 우리 기업이 크게 활약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처럼 단순 제품 수출로 이집트시장에 접근하는 방식은 피해야 한다. 이집트는 경제성장의 동반자로서 한국의 기술과 경험을 원하고 있다.
동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다는 말이 있다. 이집트경제는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 사막의 태양처럼 빛나는 아침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한국과 이집트의 수교 30주년이 되는 2025년을 기점으로 한강의 기적이 나일강의 기적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