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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정여울의 나란히 한 걸음고흐의 어린 시절을 찾아서
정여울 작가 2024년 05월호


 


얼마 전 집 안에 대책 없이 쌓여 있는 책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내가 엄마에게 농담 반 푸념 반으로 이렇게 말했다. “책 때문에 이제 내가 누울 자리도 없어지겠어. 엄마, 그냥 내 책들 다 남 줘버릴까.” 그랬더니 엄마는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친다. “그래도 책 때문에 네가 작가가 됐는데, 책으로 먹고사는 애가 무슨 말이냐.” 농담이 안 통하는 우리 엄마는 내가 정말로 책을 다 남 줘버릴까 봐 진심으로 걱정했다. 20년 전의 엄마는 ‘이 지긋지긋한 책들, 쳐다보기도 싫다’고 하던 분이었다. 내가 책의 길, 작가의 길, 글쟁이의 길로 걸어가는 것을 무척 싫어하셨다. 끈질긴 설득과 반항 끝에 나는 비로소 내가 원하는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가끔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내가 가장 원하는 길을 부모님이 끝까지 반대했다면, 나는 계속 그 길을 갈 수 있었을까. 

내가 고흐의 발자취를 더듬는 여행을 시작하면서 가장 아팠던 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고흐의 부모님은 끝까지 아들의 길을 인정하지 않았다. 목사였던 아버지는 아들이 좀 더 번듯하고 안정적인 길을 걸어가길 바랐고, 타인의 시선에 일희일비했던 어머니는 고흐의 기행(奇行)과 독특한 작품세계를 ‘광인의 것’이라 비판하는 타인들처럼 아들의 길을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어머니는 아들이 죽고, 수많은 사람에게 호평받을 때조차도 아들이 ‘그릇된 길’로 갔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자신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부모를 평생 짝사랑하고, 때로는 원망도 많이 했던 고흐는 그럼에도 부모의 사랑을 갈구했다.


인생에는 ‘마음의 밑그림’이라는 것이 있게 마련인데, 평생 그 밑그림이 일정한 패턴처럼 반복되는 경우가 많다. 엄청난 격변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패턴의 사소한 변형이기 마련이다. 고흐의 패턴은 바로 ‘영원히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 누구도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는 듯한 깊은 고립감’이었다. 그 아픈 상실감의 원형이 바로 그의 고향 네덜란드 준데르트에서 싹트고 있었다.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통제 불능의 아이


고흐는 어린 시절부터 가족은 물론 학교 친구들, 선생님들, 심지어 가정부들에게도 ‘독특한 아이’로 낙인찍혔다. 혼자 있기 좋아하는 아이, 순종적인 맛이라곤 조금도 없는 아이, 평화와 안정과는 거리가 먼 아이였다. 아이의 개성과 창의성을 인정해 주고 독려해 주는 분위기가 고흐의 집안에는 전혀 없었다.

‘아주 사소한 한 발짝에도 인생은 끝없는 내리막길로 미끄러질 수 있다’는 세계관을 가진 어머니 아나는 무조건 ‘모범적인 길’로만 아이들을 이끌려 했고, 그 기준에 맞춰지지 않는 아이, 모든 그물을 빠져나가는 바람 같은 아이 고흐는 애물단지일 뿐이었다. ‘다른 계급의 아이들과는 어울리지 말아야 한다’는 이유로 아이들이 바깥에 나가서 노는 것까지 막았던 어머니에게 고흐는 통제 불능의 아이였다. 갑자기 사라져서 하루 종일 집에 돌아오지 않는 아이, 벨기에 국경까지 걸어갔다가 새벽에 흙투성이 몰골로 돌아오는 아이를 부모는 감당할 수 없었다. 고흐는 식물과 곤충을 채집하고, 자연의 모든 움직임을 자세히 관찰하며, ‘사람들에게서 받을 수 없는 위안’을 숲과 강과 바다에서 찾고 있었다.


이런 고흐의 서글픈 기억들과는 딴판으로 내가 찾아간 준데르트는 놀랍도록 친절하고 따사로운 고장이었다. 암스테르담에서 출발해 기차와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탄 후 물어물어 준데르트에 도착하자마자 난데없는 환영을 받았다. ‘고흐의 집’이라는 현판이 붙은 작은 고흐박물관에서 만난 한 할아버지가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며 반갑게 맞아주었고,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그럼 내가 특별히 아주 멋진 가이드를 해주겠다’면서 무료로 가이드에 나섰다.

나는 평소에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해서 가이드투어를 거의 안 하는 편인데, 그러다 보니 현지 정보를 잘 몰라 놓치는 것도 많았다. 준데르트에서 태어나서 평생을 살았다는 이 할아버지는 내게 ‘준데르트에서 살았던 고흐의 모든 것’을 한 시간 안에 다 보여주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고, 나는 그의 박식함과 영어 실력, 무엇보다도 고흐에 대한 사랑에 감탄하며 기쁘게 졸졸 따라다녔다. 마치 유치원 선생님을 따라 모내기 견학을 갔던 때의 어린 나처럼 모든 것이 신기해 넋을 놓고 설명을 들었다.

그런 나를 멈춰 세운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한 무덤이었다. 분명 빈센트 반 고흐의 무덤은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있는데, 여기에 빈센트 반 고흐의 무덤이 있는 것이었다. 보는 순간 ‘아차’ 싶었다. 빈센트와 이름이 똑같은 형이 사산아였다고 했는데, 바로 그의 무덤이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사산아에게도 무덤을 만들어주는 것’이 그 가문의 자부심을 확인하는 문화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전에는 사산아나 갓난아기들에게는 장례식조차 생략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에 비해 자부심 가득한 이 신교도 목사 부부는 ‘비록 사산아일지라도 엄연히 우리의 큰아들’이라는 생각이 확고했던 것 같다.

공교롭게도 이 아이가 죽은 날짜와 똑같은 날에, 우리가 사랑하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형의 죽음’이라는 상처가 그의 이름과 생일에 낙인찍혀 있었던 것일까. 준데르트의 공립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해 자퇴한 고흐는 11살에 기숙학교에 버려지다시피 방치됐다. 고흐의 인생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원체험(原體驗)은 바로 부모님이 노란 마차를 타고 자신을 기숙학교에 버려둔 후 멀리 사라져가는 모습이었다.

가족 누구도 고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식구 중에서 가장 다정다감하고 쾌활한 아이, 우울한 고흐 집안의 ‘햇살 같은 아이’였던 테오만이 형을 따르고 떠받들었다. 고흐에게 ‘세상과 섞일 수도, 가족과 섞일 수도 없다’는 원초적인 좌절감을 안겨준 곳이 준데르트였지만, 테오와 함께 들판을 뛰어다니던 추억이 있는 곳, 테오와 함께 모래성을 만들고, 교회나 응접실에서 노래를 부르고, 다락방에서 둘만의 이야기를 나누며 우애를 키우던 장소도 바로 준데르트였다. 사람들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고흐를 최고의 영웅으로 대하는 테오를 두고 ‘형을 숭배한다’고 놀려댔지만, 테오는 형의 물감과 캔버스는 물론 생활비와 병원비까지 대면서도 형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았다. 

‘나다움’을 지키며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는 용기

완강하고 엄격하며 보수적인 부모님은 아들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테오만은 형의 광기 어린 집념과 불같은 열정을 이해했다. 그의 그림이 잉태하는 경이로운 생각의 우주를 동생만은 이해했다. 테오는 거의 1천 통에 가까운 방대한 편지를 통해 형의 고뇌를 속속들이 읽어내고 있었다. 그 편지가 없었다면, 테오의 무조건적인 애정과 헌신이 없었다면, 우리는 과연 이 아름다운 그림들을 오늘날까지 감상할 수 있었을까. 열정과 광기 때문에 세상과 소통하는 데 실패한 고흐를 그럼에도 끊임없이 가족과 세상으로 이끌었던 마음의 중재자 역시 테오였다. 테오와 고흐가 어깨동무한 아름다운 조각상을 보자 마음이 먹먹해져 왔다. 두 사람은 이렇게 죽어서도 ‘영원히 함께’였다.

사람들은 고흐를 정신병자 취급했다. 프랑스 아를에서 귀를 자르는 사건이 있기 전에도 사람들은 고흐의 미술을 광인의 작업으로 치부했다. 고흐 그림의 비틀린 형상과 충격적인 색채를 ‘병든 정신의 산물’이라고 묘사한 비평가도 있었다. 테오는 형의 과도한 붓질을 순화하고자 오랜 세월을 보냈으나 성과가 없었다. 형이 물감을 조금만 덜 사용한다면, 그러니까 그렇게 두껍게 발라대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좀 더 천천히 작업하기를, 좀 더 차분하게 한 작품에 시간을 더 많이 들이기를 바랐다. 현대의 관객들이 빈센트 반 고흐의 독특한 천재성으로 인정하는 그의 스타일을, 테오를 비롯한 당시 수많은 사람이 ‘순화해야 할 과도한 습관’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고흐는 답답한 나머지 테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고 한다. “나는 가끔 무척 빨리 작업해. 그것이 잘못이니? 나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그 ‘그럴 수밖에 없음’이 바로 고흐의 개성이었고 창조성의 원천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그의 깊은 속뜻을 안다. 고흐를 가장 사랑했던 테오조차도 이해하지 못했던 그의 독특한 개성과 필치를 이제 우리들은 비로소 이해한다. 그저 내 마음의 빛깔대로 살아가고 싶었던 빈센트 반 고흐의 처절한 ‘나다움’의 투쟁을 우리는 이해한다. ‘사람들은 왜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일까’라는 생각 때문에 괴로울 때마다 나는 고흐의 외로운 투쟁을 떠올린다. 고흐처럼 그렇게 ‘오직 나만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용기가 샘솟아 오르기를 기원하며. 고흐의 삶을 응원하는 그 따스한 마음으로, 오늘도 용감하게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는 당신의 삶을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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