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한 날이었다. 그날 나는 낮에는 SBS에 들러 라디오 독서 프로그램 〈김선재의 책하고 놀자〉의 한 코너에서 폴 오스터가 쓴 『4321』을 소개하는 방송을 녹음했고, 저녁에는 단 한 명의 인생 작가로 폴 오스터를 꼽는 (흔치 않은) 사람 바로 옆에 앉아 꽤 오랜 시간 회식을 했다. 그리고 몇 시간 후인 다음 날 아침, 폴 오스터가 77세의 일기로 뉴욕 브루클린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동시대를 살아가며 내 영혼에 숱한 지문을 남기고 삶에 잔잔한 영향을 끼친 작가의 부고를 처음 듣는 것도 아니었다. 당장 지난해에 서경식 선생이 계셨고, 조금 앞서 밀란 쿤데라도 있었다. 그러니까 그의 부고는 얼마든지 순간적인 짧은 애도와 함께 금세 스쳐 지나가는, 몇 년이 흐른 후 어딘가에서 문득 ‘폴 오스터’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내 기억 속 어딘가에 저장돼 있을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작가들의 목록에서 한번쯤 그 이름을 다시 읽고 금세 또 잊을 소식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내가 방송국 녹음실에 앉아 그에 관해 한창 이야기하던 그때, 하필이면 수많은 작가 중에서도 그를 가장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과 오랜 시간 함께 있던 그때, 그의 영혼이 실시간으로 우리 곁을 떠나 세상을 빠져나가는 중이었다는 공교로운 시간의 겹침 때문에 2024년 5월 1일(미국 현지 시각으로 4월 30일)의 어떤 장면들과 폴 오스터의 죽음은 『4321』과 맞물려 기억 속에 아주 깊이 새겨졌다. 그날 나는 하루 종일 (녹음에 필요할지 몰라 챙긴) 총 네 권, 1,500여 쪽에 달하는 『4321』 양장 세트를 통째로 가방에 넣고 다녔는데, 마치 가방을 멜 때마다 어깨에 느껴지던 육중한 무게가 그대로 마음에 옮겨져 그 모든 것을 기억의 판 위에 꾹꾹 눌러놓은 것처럼.
사실 묘한 건 이날만은 아니었다. 올해가 묘한 해였다. 그의 책 두 권을 별 감흥 없이 읽은 2003년부터 2023년까지 폴 오스터는 나에게 ‘다시 읽을 일 없는 작가’였기 때문이다. 『4321』은 올해 1월, 20년 만에 읽은 그의 책이었고, 그를 제대로 만난 첫 책이었다. 누구와도 비슷하지 않은 이 ‘새로운’ 작가에게 나는 온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이제서야. 인생 작가로 폴 오스터를 꼽는 또 한 명의 (역시 흔치 않은) 친구 P가 아니었다면, 마침 1월에 병가 휴직을 받아 시간이 많지 않았더라면, 이 책을 읽는 일은 없었을 테고, 그것은 내가 삶에서 저질렀는지도 모르고 지나쳐 왔을 수많은 잘못된 선택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리고 『4321』은 주인공인 아치 퍼거슨의 네 가지 버전의 삶을 통해, 우리가 내리는 그런 크고 작은 선택들과 삶 곳곳에 숨어 있는 ‘우연’들이 절묘하게 만나서 생성하기도 하고 폐기해 버리기도 하는 무수한 가능성의 세계를, 이제 막 풀리기 시작한 운명의 올 하나까지 아주 세밀하게, 그러나 한순간 충격에 휩싸여 숨 하나 내쉴 수 없을 정도로 가차 없이 탐색한다. 아마도 그 세밀한 가차 없음의 절정은(스포일러가 되지 않게 이 책을 읽은 사람만 알 수 있는 암호처럼 표현한다면) ‘거대한 빈칸’일 것이다.
(...) 반드시 써야만 하는 책이었다. 신은 어디에도 없다고,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하지만 삶은 어디에나 있고, 죽음도 어디에나 있고,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는 그렇게 합류한다. - 4권 p.445
5월의 첫날, 우연이 만들어낸 인연으로 20년 만에 만난 대작가를 그가 생전에 그렇게나 정밀한 마법처럼 구축해 온 ‘우연의 미학’, 아름답게 겹친 겹겹의 우연 속에서 떠나보내며 문득 떠올린 것도 그 ‘빈칸’이었다. 그날에야 비로소 알게 됐다. 그 빈칸이 사실은 얼마나 빼곡한 진실들과 쓰이지 못한 글자들로 치열하게 꽉 차 있었는지. 그랬다. 그렇게나 꽉 찬 빈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