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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정여울의 나란히 한 걸음이야기가 피어나는 공간을 찾아서
정여울 『오직 나를 위한 미술관』, 『문학이 필요한 시간』 저자 2024년 06월호

당신의 잃어버린 감수성을 자극하는 장소는 어디인가?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당신을 그 때 그 시간 아름다움 속으로 초대하는, ‘눈물 버튼’을 누르는 장소는 어디인가. 그런 장소가 많다면, 당신은 더없이 충만하고 복된 삶의 주인공이다. 그런 장소가 거의 없는가? 그렇다면 당신 자신을 위해 더 맹렬하게 ‘추억의 장소’를 만들려는 노력을 지금부터 시작했으면 좋겠다.

기억하고 싶은 행복한 순간들이 많은 사람이야말로 감성의 재벌이자, 추억의 재벌이 아닐까. 무엇보다 이런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자산을 지닌 사람의 행복은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추억이 부족해 그토록 자주 우울한 것인지도 모른다. 충분히 행복한 기억을 많이 저장해 두지 못했기에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처럼 행복한 유년시절의 추억을 아름답게 곱씹을 수 없는 것이다.

추억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가장 확실한 조력자는 맛있는 음식, 소중한 사람, 지칠 줄 모르는 흥겨운 수다 같은 것들이다. 감미로운 음악, 아늑하고 기분 좋은 공간, 무엇보다도 그때 그 시간 그 사람과 함께해야만 나눌 수 있는 강렬한 추억의 아우라야말로 우리가 여행을 통해 진정으로 갈망하는 꿈이라 생각한다. 그때 그 사람이 내 곁에 없었더라면 내 영혼이 얼마나 추위에 떨었을까를 깨닫는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진짜 어른이 되는 순간이다. 그리하여 추억이 가난한 사람, 곱씹어 볼 아름다운 추억이 별로 없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깊은 영혼의 추위에 떨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추억의 부자가 되고 싶었다. 다른 것은 많이 갖지 못해도 오직 ‘추억만은’ 무궁무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토록 많은 장소를 향해, 그토록 여러 번 여행을 떠났던 이유는 더 소담스러운 추억의 장소들을 마음속에 간직하기 위해서였다. 그럴 때마다 내 영혼도 한뼘씩 무럭무럭 자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소 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서』에 나오는 레오니 이모 집의 모델이 된 집으로 지금 은 마르셀 프루스트 박물관 으로 활용되고 있다

현실과 소설의 합작품 일리에-콩브레

소설 속의 장소 중에서 내가 꼭 가보고 싶었던 곳 중 하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아름다운 프랑스 시골 마을 일리에-콩브레다. 작품 속 마을 이름은 ‘콩브레’인데 지금 이 마을의 실제 이름은 ‘일리에-콩브레’다. 

이 마을의 이름은 원래 ‘일리에’다. 그런데 소설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이 마을을 모델로 삼아 소설 속 지명을 ‘콩브레’라고 지었다. 이후 일리에 마을은 이곳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배경이 된 기념비적 장소가 됐다는 사실을 기리기 위해 지명을 바꿨다. 일리에-콩브레는 그러니까 현실과 소설의 합작품인 셈이다.

이 마을에는 프루스트의 삶을 기념하는 박물관이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레오니’ 이모 집의 모델이 된 장소다. 소설 속 어린 ‘마르셀’은 천식으로 힘들 때마다 공기 좋은 시골 마을 콩브레로 와서 요양을 했는데, 그때 머문 곳이 레오니 이모 집이었다. 소년은 그 시골 마을에서 레오니 이모와 수많은 마을 사람을 만나 인생과 예술과 사랑에 눈을 뜨게 된다.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는 레오니 이모가 그저 엑스트라에 불과한 줄 알았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이 작품을 읽어보니 소설 속 레오니 이모의 존재가 너무도 소중하게 다가온다. 우리를 실제로 지켜주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그때 그 시절 내가 가장 취약했던 그 순간 내 곁에 있어 주던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안다. 내가 가장 아프고 여릴 때, 내 영혼의 등불이 돼주는 사람이야말로 추억의 영웅이라는 것을.

천식에 걸려 고생하던 어린 시절 레오니 이모네 집은, 강한 남자로 키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르셀을 혹독하게 훈육하는 아버지의 엄한 목소리로부터 마르셀을 보호해 주던 최고의 피난처였다. 콩브레는 주인공 마르셀에게 내가 얼마든지 약해져도 되는 곳, 앓는 소리를 하고 좀 어리광을 피워도 되는 안식처였던 셈이다. 그 따스한 콩브레 시절을 상징하는 사람이 바로 레오니 이모다. 레오니 이모가 머나먼 친척 아이 마르셀을 따뜻하게 보살펴 주는 대신 그의 방문을 귀찮아하거나 그에게 무관심했다면 콩브레 시절은 이토록 아름답게 그려지지 못했을 것이다. 콩브레 시절이야말로 마르셀의 가장 원초적인 유년 시절의 기억을 담당하고 있는 추억의 보물상자였던 것이다.

사실 레오니 이모는 마음이 많이 아픈 사람이었다.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난 뒤 그녀는 세상을 향한 모든 마음의 창문을 닫았다. 침대 밖으로 나오기를 싫어하고, 외출은 철저히 거부한 채, 스스로를 방 안에 가뒀다. 그녀는 세상 밖으로 나오기를 거부하면서도 바깥세상에서 들려오는 온갖 소문과 이야기에는 관심이 많았다.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대해 오히려 보통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을 정도였다. 레오니 이모는 집 밖으로 나오지 않지만, 레오니 이모의 집은 오히려 세상 모든 이야기가 모이는 장소, 흥미로운 사건들이 집결하는 장소라 할 수 있었다. 이런 신비로우면서도 흥미로운 존재, 레오니 이모를 통해 마르셀은 인간 세상의 온갖 비밀들을 알게된 것이며, 이야기를 수집하고 이야기를 더 재미있는 방식으로 들려주는 방법을 깨닫게 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콩브레 시절 이야기는, 인간의 가장 결정적인 행동 패턴은 어린 시절 그와 가장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과 함께한 시공간 속에서 형성될 수밖에 없음을 증명해 준다. 나 또한 레오니 이모처럼 겉으로는 차가워 보여도 마음은 한없이 따사로운 사람들이 있었기에 인생에서 힘겨운 시간을 그들의 ‘이야기의 힘’으로 버텨낼 수 있었다. 수많은 고통의 폭풍우가 몰려와 내 인생을 이리저리 휘저어 놓을 때도 그 추억 속의 장소에서 함께해 준 사람들이 남기고 간 따스한 인생의 온기 덕분에 나 역시 그 아픔을 견뎌낼 수가 있었다.

살아갈 힘을 주는 추억의 보물창고

레오니 이모의 집이 풍기는 따스한 분위기와 함께 하녀 프랑수와즈가 만들어 준 맛있는 음식들도 콩브레 시절을 가장 향기로운 인생의 황금 시절로 만든 일등 공신이 아니었을까. 레오니 이모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그 어떤 욕심도 없기에 타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기울인다. 레오니 이모는 동네 사람들의 아주 사소한 이야기나 소문까지도 마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인 것처럼 재미있게 들어준다. 아무리 사소한 사연도 중요하게 기억하고 간직해 주는 레오니 이모 덕분에 마르셀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 소설가가 됐을지도 모른다. 레오니 이모 집의 흥미로운 분위기 덕분에 마르셀은 자칫 우울할 수 있는 유년기를 오히려 더욱 풍요롭고 아름다운 추억의 보물창고로 간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에게도 콩브레 같은 장소, 내 모든 이야기의 씨앗을 간직한 아름다운 유년의 장소가 필요하다. 레오니 이모가 주는 쌉싸름한 홍차와 달콤한 마들렌은 이후 마르셀의 인생에서 가장 꾸밈없는 행복의 원초적 이미지를 간직한 추억이 된다. 지금 이렇게 소중한 추억의 장소에 대한 글을 쓰면서 마음속으로 간절히 비는 소원이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기나긴 겨울밤을 견딜 추억의 장소가 아주 많이 존재하기를, 당신이 가장 외로울 때 당신의 곁을 든든하게 지켜줄 추억의 이야기가 마음의 광주리를 한가득 채울 수 있기를.

이런 간절한 염원을 담아 나는 여행을 하고, 글을 쓰고, 독자들과 만나는 북콘서트를 열고 있다. 누군가와 함께 나눈 추억의 장소를 가슴에 품는다는 것, 그것은 평생 마음속에 간직할 ‘공감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소중한 일이다.
 
글·정여울 『오직 나를 위한 미술관』, 『문학이 필요한 시간』 저자
사진·이승원 『학교의 탄생』, 『세계로 떠난 조선의 지식인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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