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은 한때 더 가볍고, 더 오래가고, 더 위생적인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인류를 구원한 신기술로 여겨졌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플라스틱은 지구 멸망을 앞당길 골칫거리로 간주된다. 무엇보다 썩지 않는다는 장점은 치명적인 단점이 돼버렸다. 테라클(Terracle)은 폐플라스틱 재활용 스타트업이다. 사라질 수 없다면 다시 태어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친환경적인 플라스틱 사용법이라고 말하는 권기백 대표를 만나 지구를 지키는 기술에 대해 들었다.
테라클을 한 문장으로 설명하면 ‘폐플라스틱을 재활용하는 회사’다. 물론 단순한 분리나 재성형이 아닌 그들만의 ‘특별한’ 기술이 들어간다. “해중합이라는 기술을 사용해 폐플라스틱을 원재료 상태로 되돌리는 일을 합니다. 밀가루와 물을 반죽해 구워 만든 빵을 다시 물과 밀가루로 되돌리는 일을 한다고 할까요.” 테라클은 폐플라스틱 중에서도 페트(PET) 작업을 주로 한다. 해중합 기술을 이용해 페트를 원료 상태인 TPA(테라프탈산, 가루)와 EG(에틸렌글리콜, 액체)로 만들고 있다.
제 기능을 다한 페트병은 테라클을 통해 산업 곳곳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재활용되는 기회를 얻는다. “폐플라스틱을 처음 원료 상태와 똑같은 순도, 수준으로 되돌리고 있습니다. 당연히 원래 쓰이는 분야에 그대로 사용할 수 있죠. 주로 대기업 화학사에 필름과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원료로 납품합니다. 조만간 고객사와 함께 그 내용을 공개할 예정입니다. 계속 눈여겨봐 주시면 곳곳에서 저희 결과물이 적용된 제품들을 만나보실 수 있을 겁니다.”
폐플라스틱에 생명력을 주입하는 기술
일반적인 플라스틱 재활용을 선형적 재활용이라고 한다. 다시 빵으로 설명하면 폐기된 빵을 잘게 부수고, 그걸 다시 뭉쳐 조금 다른 빵을 만드는 것. 이 방식으로는 곰팡이 등으로 기존의 물성이나 색상이 변했을 경우 다시 원래 형태로 되돌리는 데 한계가 있다. 결국 재활용 섬유나 시트 등으로 한 번 정도 재활용된 후 소각된다. 사용기간만 조금 더 늘렸을 뿐 순환 고리는 끊어진다. 반면 테라클의 해중합 기술은 이런 단점을 보완한 순환형 재활용이다. “폐플라스틱을 녹색기술 인증 기준 97% 수준의 원료 상태로 되돌립니다. 나머지 3% 역시 폐기하지 않고 공정을 추가해 가능한 한 100%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100% 자원순환이란 목적도 있지만, 손실을 줄여 경제성을 높이기 위함입니다.”
테라클에서 유일한 비이공계 출신인 권 대표는 창업 전 광고회사에서 근무했다. “ESG라는 단어가 국내에 들어오기 전이었습니다. 당시 친환경 광고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알고 보니 해당 제품은 단 한 번도 재활용된 적이 없었습니다. 충격이었죠. 보여주기식 광고에 일조했다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웠습니다.”
권 대표가 공부를 시작한 계기였다. 이후 괜찮은 기술도 발견하고 여러 아이디어도 떠올랐지만, 전공자가 아니다 보니 한계가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카이스트 오픈벤처랩 프로그램에 등록했고 그렇게 창업의 길로 들어섰다.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몰랐기에 창업이란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공장을 만들어 제품으로 상용화하는 데는 좋은 기술과 그 기술을 활용할 또 다른 기술이 필요했던 거죠. 다행히 경험 많은 고문을 비롯한 여러 좋은 동료와 해중합 기술로 사업화에 성공했습니다.”
테라클은 최초의 지구 ‘테라’와 미라클, 리사이클의 ‘클’을 합쳐 ‘지구의 기적’을 의미한다. 이미지에 그치는 친환경이 아닌 지구에 진짜 도움이 되겠다는 목표를 담았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면 그 맨 앞에 테라클이 서기 위해 열심히 도전 중이다. “환경 보호를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합니다. 개인의 양심에 기대고, 소비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 대신 과학기술과 이를 뒷받침하는 산업이 힘을 모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권기백 대표는 나일론, 폴리우레탄 등 취급하는 소재 확장에도 힘쓰고 있다. “해중합 기술은 그 종류만 10가지 정도로 다양합니다. 진행하는 온도, 사용하는 촉매에 따라 활용 결과도 다르게 나타나죠. 물론 원하는 품목에 맞는 기술을 상용화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큰 비용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진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 오염 문제도 반드시 해결해야 할 숙제입니다. 저희 역시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며 화학 용매를 폐기물로 대체하거나 폐수를 회수하는 기술 등 하나둘 노하우를 쌓아가고 있습니다.”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혁신
2021년 테라블록으로 출발한 테라클은 지난 4년 동안 괄목할 성장을 이뤄냈다. 그리고 권 대표는 성장 과정에서 얻은 노하우를 나누는 데도 거리낌이 없다. “관련 기술을 개발하는 업체가 요청할 경우 되도록 많은 정보를 제공하려 합니다. 대단한 자신감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솔직히 구조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쉽지 않은 분야입니다. 기술 개발부터 공정 진행까지 환경이 열악해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사실 오늘도 인터뷰를 위해 정장을 입고 왔는데, 공장에서 업무를 보다 결국 먼지를 뒤집어써 어쩔 수 없이 옷을 갈아입고 왔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웃음).”
테라클이 속한 친환경 산업에서 기업 간 교류는 특별한 일이 아니다. 권 대표 역시 창업 선배들의 많은 도움 속에서 성장했고, 지금도 길이 막히면 조언을 듣고 있다. 신산업 분야에서 이런 활발한 교류는 성장에 큰 자산이 된다. “모두 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동료인 셈이죠. 우리가 힘을 모아 대한민국 친환경 산업의 수준을 끌어올려 세계에서 인정받는다면, 앞으로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질 것입니다.”
지난 3월 테라클은 105억 원 규모의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권기백 대표는 투자금 규모보다 자원순환 목표에 더 빠르게 도달할 기회를 얻은 것 같아 기쁘다고 말한다. 그리고 주변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성과라 강조한다. “한국화학연구원의 기술이전으로 시작해 한국환경산업기술원의 연구 공간, 컨설팅 지원을 받았습니다. 중소벤처기업부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단계별로 큰 성장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정말 여러 관심과 지원을 바탕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국가를 넘어 인류에 기여하는 회사로 성장해 보답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권기백 대표에게 혁신에 관해 물었다. “혁신은 마음먹은 일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회사를 만들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어려운 일들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성과는 없습니다. 고심 끝에 결정한 일을 행동에 옮기는 것 그리고 시작했다면 열심히 하는 것이 제 혁신의 원동력입니다. 그리고 제가 꿈꾸는 혁신의 결과물은 우리만의 독보적인 기술력으로 지구에 꼭 필요한 기적을 만드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