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개개인의 성격을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구분해서 이해하려는 유형론적 시도들은 늘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아서 관련한 질문들이 시대마다 형태만 좀 바뀔 뿐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온다. 나 역시 “AB형이죠?”, “혹시 게자리?”, “INFP 아니에요? 아니면 INFJ?”(마이너한 버전으로는 사상체질이 반짝 인기를 끌던 옛날 옛적의 “소음인이세요?”가 있다) 같은 질문들을, 심지어 소개팅에서 몇 시간 본 게 전부면서 저렇게 확신에 차 있어 은근히 짜증 나는 경우까지 포함해서 숱하게 받아봤다.(이런 것에 정통한 친구 말에 따르면 저 질문들은 모두 “엄청 내성적이고 가끔 종잡을 수 없게 감정적인 사람이죠?”의 변주들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짜증나….)
그중에서 단 한 번도 메이저한 자리를 차지한 적은 없지만 아주 오랜 세월 은은하고도 끈질기게 이어지는, 나름의 신빙성과 한국이라는 지역적 특수성도 일부 반영하고 있어 지지층이 꽤 탄탄한 성격유형론이 있으니 바로 “첫째예요, 둘째예요?”로 대표되는 ‘출생 순서 이론’이다. 한국에서 한때 ‘아들러 심리학 열풍’을 일으켰던 오스트리아 정신의학자 알프레드 아들러가 어느 정도 토대를 만든 이론으로, 출생 순서에 따라 주어지는 역할과 관계성이 성격 발달과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이다. 평소 ‘T인지 F인지’보다 ‘K장녀인지 차녀인지’가 한 사람에 대해 말해주는 정보 값이 훨씬 많을 거라고 여겨온 나로서는, 이 주제를 정면으로 다룬 이진송 작가의 『차녀 힙합』이 더없이 반가웠다.
혹시라도 (다른 성격유형론들이 으레 다 그렇듯) ‘K차녀론’이라는 하나의 이론을 무리하게 일반화해 모든 개인이나 가족에게 적용하려 드는 내용이 아닐까 의심스러워 이 책을 놓치는 일이 부디 없기를 바란다. 이 책은 그보다 훨씬 더 멀리 나아가고 더 넓게 조망한다. 이를테면 산아제한 정책과, 그 시기에 때마침 등장한 초음파 기계로 가능해진 성별 감별 그리고 유교 가부장제가 만든 뿌리 깊은 남아선호사상, 이 세 가지가 합쳐진 결과로 대대적인 여아 선별 임신중단이 이뤄진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 뒤, 그 아수라장에서 용케 세상에 태어나는 데 성공했지만(태어나자마자 이미 ‘생존자’인 슬픈 역설) 단지 ‘아들이 아닌 존재’라는 이유만으로 딸들에게 저절로 부과되는 엄청난 존재 증명의 책임이 최근 10년간 어딘가 수상쩍게 불고 있는 ‘딸 바보 열풍’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날카롭게 벼려진 시선으로 정확하게 짚어낸다.
그렇다. 아들을 중요하게 여기는 한국의 문화에서 ‘아들 키우기’의 가치를 (감히) ‘딸 키우기’(따위)가 뛰어넘으려면 수많은 보상을 딸이 안겨줘야 한다. 아들 키우는 것만큼 힘들어서는 절대 안 되고, 모두를 사르르 녹이는 귀여운 애교와 사랑스러운 외모 등으로 커다란 ‘딸 키우는 재미’를 선사해야 한다. 먼 미래에 병약해진 양육자를 돌봐줄 거라고 기대받는 쪽도 대부분 딸이다.
결국 첫째 딸은 여성성 샤워를 시키고, 장남에게는 남자답기를 강요하고, 둘째 딸에게는 아들 노릇을 하라고 죄책감을 자극하며, 차남에게는 딸처럼 굴기를 바라는 양육모델이 비슷비슷한 맥락 속에 있다. 가정은 권력을 가진 어른이 규범을 정하기에 쉽게 폭력이 배양되는 곳이다. -p.136
매 장 주옥같은 이야기가 가득하지만 특히 2부에 실린 <딸이라는 로망> 편은 꼭 권하고 싶다. 출생 순서에 따라 양육자의 욕망이 어떻게 다르게 반영되는지, 이게 여성성-남성성 같은 젠더 고정관념을 얼마나 강화하는지, 그에 따라 K자녀들의 운명은 어떤 양상으로 펼쳐지는지가 아주 생생하게 담겨 있다. 정말이지 힙합 그 자체인 책이다. 힙합이 소외된 자들의 목소리이자 무기라는 점에서까지 완벽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