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마다 꽃길이 펼쳐지고, 손길 닿는 곳엔 새로운 영상이 등장한다. 페인트팜 연구실의 특수페인트 디지털 패널 위로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대형 지구본 위 영상을 스틱으로 조정하면 세계 각국의 날씨를 알려주고, 공중 맥주잔에는 보기만 해도 시원한 맥주가 채워진다. 디지털 사이니지(Digital Signage; 공공장소를 비롯한 실내외 공간에 설치된 디스플레이) 스타트업 페인트팜은 2D를 대표하는 페인트로 디지털 세상의 첨단을 달리고 있다.
토목공학을 전공한 김학정 대표가 페인트 사업에 뛰어든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페인트는 건설업에 아주 중요한 재료였고, 오래전부터 아버지가 운영하던 페인트 가게는 그에게 익숙한 장소였다. 물론 김학정 대표의 합류로 아버지의 사업은 전혀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가게에 온 손님에게 페인트칠하는 방법을 1시간 정도 설명하면 한 통 정도 사가십니다. 시간당 2천 원 수익이죠(웃음). 5분 후 같은 상황이 반복됩니다. 그래서 설명 영상을 만들었습니다.”
가게에 TV를 걸고 작업 과정을 찍은 영상을 틀어놨지만, 안타깝게도 손님들의 질문은 계속됐다. 영상은 결국 온라인으로 자리를 옮긴다. 노하우가 유출되고 안내 영상이 회사 매출로 이어지지 않을 우려도 있었다.
실제로 영상을 자신들 것인 양 악용하는 경쟁사도 있었지만, 김 대표는 정보는 흘러야 한다는 생각으로 눈감아 줬다. 자신감도 있었다. 다행히 영상을 통해 고객이 늘었고, 온라인 쇼핑몰도 만들었다. 그렇게 “페인트를 판다”는 조금은 단순한 이름의 ‘페인트팜’이 시작됐다.
니치 마켓이던 특수페인트 개발에 뛰어들다
순조롭게 성장하던 온라인 쇼핑몰은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주춤하기 시작했다. 경쟁사가 늘어나고, 매출은 늘어도 이익률이 줄어드는 상황이 반복됐다.
“누구보다 열심히 활동했지만 경쟁 업체와 같은 제품을 팔다 보니 한계가 느껴졌습니다. 자연스레 남들은 흉내 낼 수 없는 특별한 제품을 만들자는 결심이 섰고, 제조업에 뛰어들어 특수페인트 생산을 시작했습니다.”
김 대표는 가정용 일반 페인트는 여러 기업이 견고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어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 당시만 해도 국내 니치(niche) 마켓이던 특수페인트 생산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인터뷰를 진행한 10월 7일은 페인트팜이 꽉 찬 9년이 되는 날이었다.
페인트팜은 빔프로젝터 영상을 담는 스크린 페인트를 개발했다. 넘치는 자신감으로 제품을 세상에 내놓았지만, 반응은 차가웠다. “한번은 벽에 발라 영상을 투사하는 우리 제품이 기존의 흰 페인트와 무엇이 다르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시 답변도 제대로 못했을 정도로 미숙했습니다. 오히려 제품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고객들에게 화를 냈습니다. 그러다가 깨달았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받아들이고 개선해야 한다는 걸요.”
그렇게 김학정 대표는 고객의 반응과 요구를 수집하고 한남대, 카이스트 등 대학과 창업진흥원 같은 관련 기관의 조언에 귀 기울였다. 지금 페인트팜이 판매하는 스크린 페인트는 공식적으로 8번째 버전이다. 물론 비공식으로 하면 더 많다.
이처럼 경험이 쌓이며 조금씩 돌파구를 찾았지만, 자금이 늘 부족했다. 어느 날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에서 1억 원을 대출해 준다는 방송을 보게 됐고, 다행히 지원 대상으로 선정됐다. 그제야 창조경제혁신센터, 대전일자리경제진흥원 등을 통해 회사 운영에 필요한 여러 정보와 지원을 얻을 수 있었다. 페인트팜은 그렇게 디지털 사이니지 스타트업으로 재탄생했다.
마스크팩처럼 쉽게 뗄 수 있는 페인트
페인트팜의 대표 상품은 글라스용 스크린 페인트다. 반투명 시트지의 느낌으로 페인트를 유리에 칠하면 그 위로 영상이 띄워진다. 필요한 곳에 페인트를 칠하고, 제거할 땐 물을 뿌려 마스크팩을 떼듯 간단히 제거한다.
“잠깐 쓰고 지우는 디지털 사이니지를 만들었는데 한번 설치하면 고객들이 오래 잘 사용하시더라고요. 제품을 너무 잘 만들었더니(웃음) 판매가 지속되지 않았어요. 사업 방향을 수정해야 했습니다. 지금은 영상 기기 렌털 및 설치, 콘텐츠 제작까지 하고 있습니다.”
역시나 고객의 요구가 힌트가 됐다. 현장에선 페인트만 팔지 말고, 칠도 하고 장비까지 설치해 주길 원했다.
“페인트 제작 외의 일은 한동안 저희 것이 아니라고 버텼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사업 확장에 이만한 것이 없더라고요. 당시에 해외 100개국에 납품했지만, 생각보다 수익이 안 나 페인트만 팔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디지털 사이니지 도전 후 첫 대기업 납품은 SK텔레콤이었다. 수없는 검증과 미팅을 통해 4년 만에 실제 납품을 진행할 수 있었다. 충청·강원권 100여 개 대리점에 페인트팜의 페인트로 디지털 사이니지를 설치했다. 다행히 반응이 좋았다. 자신감을 얻고 일본, 베트남, 미국 등 해외사업에도 박차를 가했다.
그렇게 뉴욕 맨해튼 던킨 매장에 제품을 설치할 기회도 얻었다. 커피잔 모양의 사이니지에 반투명 페인트를 발라놓고 빔을 쏘면 영상으로 아이스 커피가 채워졌다. 던킨 CEO가 맨해튼 매장에 다녀간 후 많은 칭찬을 했다는 좋은 소식도 들려왔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이후 등장한 코로나19 팬데믹은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이제 됐다 싶었는데 모든 게 멈췄습니다. 돌파구가 필요했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평소 고객들이 원하던 콘텐츠 개발이 떠올랐습니다. 관련한 정보가 있다면 어디든 무작정 전화를 돌렸습니다.”
페인트팜은 그렇게 서울예대 고주원 교수팀과 연결이 됐다. 고 교수와 협업해 국립중앙박물관 1, 2, 3층 영상관과 실감존을 완성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을 통해 수주가 들어와 설치를 한 곳도 60여 곳에 이른다.
이런 노하우를 바탕으로 페인트팜은 각종 행사나 홍보에 유용한 이동형 프로젝션 ‘IF(이프)’를 완성했다. 자체 센서를 활용한 IF는 움직임에 따라 영상에 변화를 주며 이용자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다행히 IF 렌털사업도 점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현재 LG전자 프로젝트에 저희 플랫폼을 넣는 것을 협의하고 있습니다. CGV와도 천장 디지털 사이니지 작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터치 없이 움직임만으로 작동하는 사이니지도 개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주도 홍보를 위해 설치된 사이니지 앞을 누군가 지나가면 갑자기 제주도 풍경이 펼쳐지는 거죠. 앞으로도 많은 이의 일상에 감동을 불어넣고, 잊지 못할 경험을 선물하고 싶습니다.”
김학정 대표는 페인트팜의 지난 행보처럼 조금은 느리고 미숙하더라도 경험을 쌓으며 차근차근 쌓아 올리는 것이 혁신의 결과물이라 말한다. 물론 그의 혁신은 아직 진행 중이다. 세상의 채도를 높이기 위해 묵묵히 한 걸음 한 걸음 이어가는 페인트팜의 내일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