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크로아티아를 이야기하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고 실제로 다녀온 사람도 상당하다. 2014년 방영된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누나>의 영향이 컸다. 인근 동유럽보다 접근성이 떨어지고 덜 알려졌지만 2017년에는 한국인 관광객 수가 44만8천 명으로 정점을 찍었고, 이후 코로나19로 한국인 관광객이 뚝 끊겼다가 최근 다시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 근무 1년 반이 돼가는 지금 크로아티아가 단순히 관광지로만 알려진 것이 아쉽게 느껴진다. 크로아티아는 경제성장, IT, 자동차산업, 물류 및 에너지 인프라 등 다양한 분야에서 주목받을 만하기 때문이다.
크로아티아는 1991년부터 4년간 이어진 혹독한 독립 전쟁으로 다른 동유럽 국가들에 비해 경제성장이 크게 뒤처져 이를 빠른 시간 내에 따라잡기 위해 고군분투해 왔다. 다행히도 200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 2013년 EU 가입을 통해 EU와의 통합이 본격화됐고 2023년에는 유로존과 솅겐조약에도 가입했다. 이러한 통합은 크로아티아 경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크로아티아 중앙은행은 올해 경제성장률이 유로존 평균인 0.9%를 훨씬 상회하는 3.6%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GDP 대비 공공부채 비율도 58% 이하로 세계 평균 94%와 비교할 때 매우 안정적인 재정을 유지하고 있다. 최근 크로아티아의 신용 등급이 2015년 이후 5단계나 상향된 ‘A-’로 조정된 것도 이러한 경제적 신뢰를 반영한다.
고성능 전기차 분야의 독보적 존재 리마츠 그룹,
물류 허브로의 도약 보여주는 펠예샤츠 대교와 리예카 항만
크로아티아는 IT산업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기업은 클라우드 기반으로 커뮤니케이션 플랫폼을 제공하는 인포빕(Infobip)이다. 2006년 작은 마을에서 창립된 인포빕은 현재 자산가치 10억 달러 이상을 기록하며 크로아티아 제1호 유니콘 기업으로 성장했다. 현재 70개국에 3,400명의 직원을 두고 있으며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 대형 인터넷 기업들에 통합 커뮤니케이션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다. 올해는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 중 하나로 선정됐고 노키아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새로운 통신 애플리케이션 개발을 가속화하고 있다.
크로아티아는 전반적으로 제조업 기반이 약해 매년 약 160억 유로가 넘는 무역적자를 관광산업 등 서비스 분야에서 메꿔나가고 있지만 최근 들어 자동차산업이 전 세계적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다. 그 중심에는 리마츠(Rimac) 그룹이 있다. 리마츠 그룹은 전기 구동 시스템 및 배터리 시스템 제조 분야에서 많은 특허를 보유하고 있고 특히 고성능 전기차 부문에서 독보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자체 제작한 수퍼 전기차 네베라(Nevera)는 속도 면에서 각종 국제대회 신기록을 수립 중으로 1대당 가격이 200만 유로를 넘는다. 2021년에는 부가티(Bugatti)를 인수하며 유럽 전기차시장에서의 입지를 더욱 확장해 가고 있다. 지금까지 총 8억 유로에 달하는 투자 자금을 포르쉐, 소프트뱅크, 골드만삭스 등으로부터 유치했는데, 현대·기아차도 2019년에 8천만 유로를 투자한 바 있다.
한편 리마츠의 계열사 베른(옛 P3M)에선 자율주행 전기차인 로보택시 개발이 한창이다. 지난 6월 프로토타입까지 공개한 이 프로젝트에는 EU 기금 1억7천만 유로, 사우디아라비아 공공투자펀드 1억 유로 상당이 투자됐다. 2026년 하반기부터 자그레브에서 정식 출시할 계획이며 2027년에는 영국과 독일로 시장을 확대할 예정이다. 이를 위한 생산공장도 자그레브 인근 루코 지역에 건설 중으로 연간 최대 1만 대 생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는 크로아티아가 EU 자동차 기술 혁신의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크로아티아는 유럽 물류 및 에너지 허브로의 도약도 기대된다. 2022년 EU의 자금 지원(85%)으로 완공된 펠예샤츠(Peljesac) 대교(총길이 2,404.., 총비용 4억7,099만 유로)는 역사적인 교통망 구축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펠예샤츠 반도에서 육로로 크로아티아 남부지역을 가려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반드시 거쳐야 했지만, 대교가 신설되면서 크로아티아 내 이동만으로도 가능해졌다. 이와 더불어 리예카 항만은 헝가리로 연결되는 철도망을 현대화해 아시아와 유럽 간 물류 흐름을 개선함으로써 유통 시간과 비용을 줄이고 중앙 및 동남부 유럽의 주요 물류 허브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2023년 9월에 시작된 ‘리예카 게이트웨이’ 프로젝트는 총 3억8천만 유로 규모로, 2025년까지 진행되는 1단계 공사에만 2억 유로를 투자한다. 이에 따라 리예카항은 내년이면 연간 65만 개 컨테이너 처리 용량을 갖추게 된다. 세계 최대 선사 중 하나인 머스크(Maersk)에서 현지 기업과의 합작투자로 50년간 터미널 운영권을 양허받았으며, 2단계 투자까지 이뤄지면 처리 용량이 총 100만TEU까지 확장된다. 기존 터미널 대비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60% 줄이기 위해 아드리아해 최초로 전기 구동 크레인 등 최신 기술을 도입해 친환경 항만으로 거듭날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우리 기업인 태웅로직스는 지난 7월 내륙 운송사업 진출을 목적으로 리예카 소재 운송사인 라트란스(LA Trans)를 인수했다. 리예카항을 유럽 진출의 교두보로 활용해 유럽 국제 운송 영역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태웅로직스는 물류사업 다각화를 위해 내륙 운송사업을 기반으로 물류센터에 투자하는 계획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크로아티아의 물류산업은 여러 물류센터의 확장과 신규 건설로 활기를 띠고 있다. 머스크는 지난해 7월 리예카 인근에 1만2천m2 규모의 물류창고를 개설했다. 이 창고는 태양광 지붕과 LED 조명 등 친환경 시설을 갖췄고 리예카 터미널과의 근접성을 살려 물류와 유통 효율성을 강화하고 있다.
대형 유통체인 역시 물류센터 확장이 한창이다. 독일 유통업체 리들(Lidl)은 크로아티아 내 최대 규모의 물류창고를 지난 4월 크리츠(Kriz) 지역에 오픈했다. 이 창고는 총 16만7천m2 부지에 3만9천 개 팔레트를 수용할 수 있으며, 에너지 효율 설계와 태양광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네덜란드 유통업체 스파(SPAR) 역시 지난 10월에 총 7만5천m2 규모의 물류센터를 완공, 크로아티아 내 140개 매장에 제품을 공급할 예정이다.
체코의 건설 개발·투자 회사 RC 유럽은 슬로베니아 국경 근처 총 17만m2 부지에 8만6천m2 규모의 임대용 시설을 건설 중이다. 전기 트럭 및 자동차 충전소와 냉난방용 히트펌프 등 친환경 솔루션을 적용했다.
우리 기업으로는 2021년에 로그아시아가 크로아티아에 최초로 진출해 유럽 각국에 있는 우리 기업의 시설 신설 및 확장을 위한 화물 운송에 집중하고 있다. 리예카항을 중심으로 한 발칸반도 및 동유럽 시장 진출을 지원하기 위해 창고 이외에 내륙 터미널 투자도 검토하고 있다. 대기업으로는 지난 7월 한국타이어가 자그레브에 물류센터를 설립해 발칸반도 9개국 물류 허브 역할을 맡고 있다. 장기적으로 이를 리예카항과 연결해 중·남부 유럽의 주요 타이어 공급 거점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한국타이어 측은 밝혔다.
글로벌 기업들, 속속 물류·에너지 분야에 진출···
우리 기업 시장진출 확대 및 양국 간 시너지 기대
크로아티아는 에너지 허브로서의 잠재력도 갖고 있다. 크르크(Krk)섬의 LNG 터미널은 미국과 노르웨이에서 수입한 액화가스를 중부 및 동유럽 주요 국가로 공급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유럽이 의존하던 러시아 가스를 대체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2025년부터는 216㎞ 길이의 가스관 4개를 신설하고 터미널 용량을 현재의 두 배인 연간 61억m2까지 확대해 헝가리, 슬로베니아, 오스트리아에 이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까지 공급할 계획이다. 정부 역시 터미널 용량을 늘려 크로아티아가 유럽의 에너지 허브로서 자리매김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한편 우리 기업 SK E&S는 지난해 10월 크로아티아 원유 운송사인 야나프(JANAF)와 에너지 효율 분야 미래사업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유럽시장 공략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 기업들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 새로운 시장 접근 기회를 얻고, 기술과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양국 간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크로아티아에는 ‘즈르노 뽀 즈르노-포가차(zrno po zrno-poga.a)’라는 오랜 속담이 있다. 우리 말에서 가장 비슷한 표현은 ‘티끌 모아 태산’이겠다. 이처럼 아직은 미진하지만 조그만 협력 기회를 하나씩 쌓고 넓혀가다 보면 크로아티아에도 인근 동유럽처럼 우리 기업들이 넘쳐나게 되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