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전체가 아름답고 풍요로운 도서관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 있다. 어떤 간판을 읽어도 뭔가 멋진 소설이나 동화책과 연관되는 것 같은 느낌. 어떤 카페를 가도 ‘아마 이 작가가 여기서 글을 쓰지 않았을까?’라는 달콤한 상상을 하게 만드는 도시. 나에게는 옥스퍼드가 바로 그런 꿈의 도서관 같은 도시였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배경이 된 보들리언 도서관이 전 세계 관광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곳. <반지의 제왕>을 쓴 작가 톨킨이 친구들과 함께 토론하던 카페와 펍이 있는 곳.
티모시 샬라메 주연의 영화 <웡카>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래드클리프 카메라 도서관에 이르기까지.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모두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은 영화라는 점이다. 물론 <해리 포터>, <반지의 제왕>, <웡카>의 원작 역시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이며,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문학의 위대한 힘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그리고 이 모든 작품이 이 아름다운 도시 옥스퍼드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삶과 예술이 정교하게 혼합된 도시
책의 도시, 학문의 도시, 도서관의 도시. 옥스퍼드 곳곳을 걸으며 나는 옛 작가들이 그토록 옥스퍼드를 예찬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가 옥스퍼드라고 생각했다. 삶과 예술이 그토록 정교하게 혼합돼 완벽하게 하나가 된 곳은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프랑스 출신의 영국 작가 힐레어 벨럭은 옥스퍼드에서 영원히 머물며 보들리언 도서관의 모든 책을 읽는 것이 지구상에서 가장 멋진 유혹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영국의 작가 윌리엄 해즐릿은 로마가 성스러운 도시라고 불려왔듯이 옥스퍼드도 언젠가 그렇게 불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옥스퍼드에서 내가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은 <해리 포터> 시리즈를 비롯한 다양한 작품들에서 익히 보았던 그 아름다운 도서관, 장엄하고 화려한 보들리언 도서관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곳에 가보니 장엄함이나 화려함보다 더 눈길을 끌었던 것은 그저 평범한 책상과 의자, 스탠드 하나하나였다. 사실 나는 그곳의 사진을 찍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곳에 앉아 공부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디서나 공부는 할 수 있지만, 보들리언 도서관에서 단 몇 시간만이라도 공부할 수 있다면 수많은 학자들과 작가들의 눈부신 영감의 순간과 접신하는 듯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관광객이 아니라 그저 그곳에서 공부하는 학생이 되어 그들처럼 아름다운 교정을 걸으며 책을 읽고, 토론을 하고, 글을 쓰는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그들의 젊음, 명석함, 분명 느꼈을 법한 반짝이는 영감의 순간들을 닮고 싶었다.
그동안 내가 공부했던 모든 도서관의 추억들이 나를 빚어낸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를 만든 팔 할은 도서관의 책들이었다. 나의 불행과 외로움, 슬픔과 절망까지 꼭 안아주었던 그 낡은 도서관의 의자, 책꽂이, 책갈피 하나하나가 오늘의 나를 만들었음을 안다. 그런데 요즘 도서관의 가치, 책의 가치가 점점 위협받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얼마 전에도 한 지방의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45만 권의 장서가 폐기된다는 뉴스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모든 것이 ‘비용’ 때문이라는 것에 더욱 쓸쓸해진다. 책을 관리하고 보존하려면 인력과 비용과 공간이 필요한데, 학생들이 책을 열심히 빌려서 읽지 않기에 ‘지금까지 도서 대출 기록이 적거나 없는 것’은 ‘앞으로도 보지 않을 것’으로 간주하고 폐기 처분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 안에 인류를 구할 아름다운 아이디어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
폐기 처분될 것이라는 45만 권의 장서 속에 들어 있는 그 아름다운 생각까지 폐기 처분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인류의 생명을 구할 획기적인 의약품을 발명할 수 있는 힌트를 주거나, 노벨상을 받을 만큼 훌륭한 아이디어가 숨겨져 있거나, 단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구할 수 있는 아름다운 문장이 숨겨져 있다면. 도서관은 단지 각종 시험을 준비하는 장소가 아니라 인류의 꿈과 희망을 경작하는 아름다운 희망의 영토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실용이라는 관점에서만 도서관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소중한 가교로서 도서관을 지켜온 옥스퍼드 사람들의 지혜를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보들리언 도서관의 입장권은 비싸지만, 이곳에 온 사람들은 입장료를 절대 아까워하지 않는다. 오직 이곳에만 간직된 수많은 꿈과 희망의 가치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렇게 아름다운 도서관을 가꾸고, 보존하고, 지켜낼 아이디어를 고안할 필요가 있다.
도서관에서 20~30대의 가장 눈부신 시절을 보낸 나는 여전히 세상 모든 도서관에 매혹된다. 전 세계 여행자들의 관광명소가 된 대영도서관부터 평범한 시골 마을의 작은 도서관까지. ‘도서관은 미래다’라는 말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어렸을 때 나는 도서관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는 아이였다. 도서관이라는 곳이 있고, 거기서 얼마든지 책을 읽어도 된다니. 중·고등학교 때 그곳은 나와 친구들의 아지트였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공부도 하고 김밥과 라면도 사 먹으며 우리는 미래를 꿈꾸었고, 그렇게 꿈꾸던 작가의 삶을 오늘도 조금씩 가꾸어가고 있다. 이제 세계 각국의 도서관은 나의 아름다운 여행지가 되었다. 책의 향기, 지성의 향기가 가득한 옥스퍼드 곳곳을 걸으며 나는 이 도시 전체가 거대한 도서관처럼 느껴지는 그 황홀한 기분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내게 도서관은 절망에 맞서 싸우는 마음의 요새와도 같은 곳이기에.
행복한 의무감으로 수행하는 글쓰기의 축복
옥스퍼드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던 톨킨은 <반지의 제왕>을 완성하기까지 친구들과 함께 읽고 쓰고 토론하며 자신의 글이 매번 나아지는 축복을 경험했다. 나는 톨킨의 전기를 읽으며 그의 삶에서 반짝이던 읽기와 쓰기의 축복을 한없이 부러워했다. 주변 사람 모두가 책을 좋아하기에 ‘책이 얼마나 소중한지’ 굳이 매일 설명할 필요가 없는 그들의 환경이 부러웠다. 그런데 지금은 지식인, 작가, 창작자의 ‘책임’에 대한 생각을 더 자주 하게 됐다. 막상 작가가 돼보니 나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누군가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독자가 이런 메시지를 남겨주었다. 작가님의 글을 통해 아픔을 치유받고 하루하루 힘겨운 삶을 잘 버티는 중이라고. 독자의 그런 편지가 작가의 힘겨운 하루하루를 또 한번 버티게 해준다. 그런 독자의 편지를 받으면 단순한 안간힘이 아니라 ‘행복한 의무감’으로 하루를 견딜 수 있게 된다. 더 나은 글을 써야 한다는 의무감이 행복하게 느껴지는 순간, 그럴 때 좋은 문장이 나오기 시작한다.
옥스퍼드의 도서관, 서점, 교회와 학교 곳곳을 걸으며 느낀 것은 ‘이렇게 많은 책들, 이렇게 많은 작가들, 이렇게 많은 독자들’이 만들어가는 보이지 않는 공동체의 아름다움이었다. 문자로 된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세계. 그것을 가리키는 아름다운 용어가 바로 ‘구텐베르크 은하계’다.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한 이후로 전 세계는 ‘책을 읽는 사람들의 공동체’로 연결됐고, 내가 꿈꾸는 아름다움 또한 바로 그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아름다움이었다. 나는 옥스퍼드의 거리를 걸으며 간절히 기원했다. 당신이 책을 읽음으로써 더욱 아름다운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 있기를. 당신이 아름다운 책의 주인공처럼 향기롭고 눈부신 삶을 살 수 있기를.
글·정여울 『감수성 수업』,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저자
사진·이승원 『학교의 탄생』, 『세계로 떠난 조선의 지식인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