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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정여울의 나란히 한 걸음노스탤지어와 눈부신 미래가 공존하는 곳
정여울 『감수성 수업』,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저자 2025년 01월호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품는 삶은 가능할까. 과거의 흔적을 간직하면서도 항상 새로워진다는 것은 가능할까. 과거를 잊지 않으면서도 현재를 소중히 여기고, 미래를 향한 힘찬 발걸음 또한 게을리하지 않는 삶. 그런 삶을 꿈꾸게 하는 도시가 바로 베를린이다. 베를린은 기념비적인 이집트 유물로 가득한 신박물관(Neues Museum)부터 동독의 흔적을 오롯이 간직한 DDR박물관까지, 인류의 역사를 보존하는 온갖 노력의 흔적들이 가득한 곳이다.


베를린은 박물관의 도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온갖 과거의 역사적 상징들이 가득하다. 그런데 베를린의 수많은 박물관이 보여주는 것은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이기도 하다. 지금, 이 순간 최고의 주목을 받고 있는 현대 미술 작가들의 작품이 ‘현재’를 보여준다면, 첨단기술의 유토피아를 보여주는 전시들과 지구환경 보호를 위한 다채로운 노력은 ‘미래’를 위한 적극적인 준비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중고등학교 교육은 물론 대학 교육까지 무상으로 제공되는 교육환경이야말로 독일의 ‘미래’를 보여주는 청사진이라 할 수 있다.

베를린은 온갖 볼거리로 가득하지만, 여행이 끝난 후 오랜 시간이 지나 베를린을 돌아보면 ‘동독과 서독의 과거’를 상징하는 장소들이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예컨대 베를린 장벽은 가보기 전과 가본 뒤의 느낌이 완전히 다른 장소 중 하나다. 직접 가보기 전의 베를린 장벽은 그저 뉴스에서 가르쳐주는 대로 ‘냉전 시대의 종식’을 상징하는 기념물로 각인돼 있었다. 그러나 이제 베를린 장벽은 역사적 국경을 넘어 다양한 경계를 뛰어넘는 삶을 상상하게 만든다. 


베를린 장벽의 앞뒷면은 서로 다른 그림들로 가득하다. 각각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의 장벽이었던 앞면과 뒷면은 이제 ‘거리의 아티스트’가 자신의 눈부신 재능을 실험하는 거대한 캔버스가 되었다. 저마다의 아이디어, 상상력, 미래를 향한 꿈을 담은 아티스트들의 그림으로 가득하다.


베를린 장벽의 실제 콘크리트 벽을 하나하나 깨서 기념품으로 만든 미니어처 상품도 있다. 베를린 장벽 미니어처를 보고 있으면 파란만장한 역사의 흔적이 이 형형색색의 돌 조각 속에 올올이 스며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해진다.

특별한 겨울을 만들어 주는 크리스마스 마켓

베를린의 또 하나의 명물은 도시 곳곳에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오색찬란한 크리스마스 마켓이다. 뮌헨의 고색창연한 크리스마스 마켓이 더욱 유명하긴 하지만 베를린의 크리스마스 마켓은 도시 곳곳에서 다채로운 모습으로 열려 이곳저곳 찾아가며 느끼는 재미가 있다. 


한겨울의 베를린은 일조량이 매우 부족하기 때문에 어딜 가나 ‘빛을 찾아 떠나는 작은 모험’이 필요하다. 특히 오후 세 시만 되면 초저녁의 느낌이 날 정도로 날이 빨리 저물기 때문에 겨울에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상인들의 손길이 유독 바쁘다. 크리스마스 마켓은 글뤼바인(와인에 계피와 정향 등을 넣어 끓인 겨울 음료)과 독일식 밀맥주를 비롯한 수많은 음료와 프레츨, 슈톨렌 등의 간식, 독일 정통 소시지로 만든 커리부어스트 등을 서서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크리스마스 마켓은 하루의 피로를 풀고 맛있는 저녁을 먹는 사람들의 환한 미소로 가득하다.

어쩌면 인류는 겨울의 추위와 기나긴 밤을 견뎌내기 위해 크리스마스 마켓을 만든 것은 아닐까. 태양 빛이 빨리 저무는 대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환하게 켜지는 회전목마의 불빛, 크리스마스 트리의 불빛, 산타클로스의 썰매를 끄는 루돌프 사슴코의 붉은 빛. 그 찬란한 빛들이 어둠과 추위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따스하게 어루만져 주는 것만 같다. 건물 전체에 프로젝터로 비추는 별 문양도 아름답다. 마치 군무를 추는 듯한 별들의 회오리가 여행자의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베를린 크리스마스 마켓에는 한겨울의 추위, 배고픔, 우울을 떨쳐낼 수 있는 따스한 음식, 환한 미소, 친절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기나긴 겨울밤의 어둠 속에서 때로는 꽃처럼 때로는 별처럼 빛나는 크리스마스 마켓의 불빛을 찾아 헤매는 우리들의 마음 속에는 따스함과 환함을 갈망하는 오랜 본성이 깃들어 있다.

베를린은 나에게 예술의 도시, 평화의 도시 그리고 학문의 도시로 다가온다. 박물관섬(Museumsinsel)이라는 지명과 지하철역이 있을 정도로 미술작품과 역사적 유물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 넘쳐난다.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 중 하나인 베를린 필하모니 또한 이 도시의 눈부신 자랑이다. 독일은 클래식 음악 마니아들의 천국이라고도 불린다. 도시마다 뛰어난 실력과 유서 깊은 역사를 자랑하는 오케스트라가 있어 위대한 연주자와 지휘자들의 공연을 사시사철 관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주자나 성악가들이 안정적으로 취업을 하고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오케스트라가 유독 많은 곳이 독일이다.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유서 깊은 도시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에서는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한국인 성악가 연광철 테너가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 ‘궁정가수’로 임명되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또한 동독과 서독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짐으로써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상징이 된 곳이 바로 베를린이기도 하다. 그뿐만 아니라 훔볼트대와 베를린자유대를 비롯한 세계적인 학문의 메카가 자리 잡은 곳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대학 교육이 무상으로 실시되고 있는 꿈같은 곳이다. 또 베를린은 유럽의 다른 어떤 대도시보다 물가가 안정돼 있는 도시다. 베를린에서는 숙박비나 장바구니 물가에 대한 걱정을 많이 내려놓고 마음껏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즐길 수 있다.

베를린에는 32유로에 72시간 동안 30개가 넘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관람할 수 있는 뮤지엄 패스가 있다. 120유로짜리 뮤지엄 패스는 무려 1년간 자유롭게 베를린의 모든 미술관을 드나들 수 있는 만능열쇠와 같은 존재다. 그중에서도 내가 특히 좋아하는 곳은 페르가몬박물관, 신박물관 그리고 함부르거 반호프 국립현대미술관이다. 그리스 로마 신전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거대한 페르가몬박물관의 스펙터클은 눈을 의심하게 만들 정도로 화려한 위용을 자랑한다(아쉽게도 페르가몬박물관은 현재 대대적인 공사에 들어가 2027년까지는 관람할 수 없다). 함부르거 반호프 국립현대미술관은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비롯해 다채로운 현대미술의 실험적 걸작들이 매번 새롭게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신박물관은 유럽 최고의 이집트 컬렉션을 자랑한다. 특히 함부르거 반호프는 과거의 기차역을 개조해 미술관으로 만든 곳이다. 버려진 공간이나 쓰임을 다한 공간을 어떻게 창조적으로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곳이기도 하다. 루브르박물관이나 오르세미술관의 어마어마한 인파에 놀라 미술관 관람을 포기한 분들에게 베를린의 미술관을 추천하고 싶다. 쿨투어포룸의 국립회화관에서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우리가 알고 있는 비너스와 다른 버전으로서, 피렌체의 비너스와 달리 홀로 서 있는 비너스)와 베르메르의 작품들까지 감상할 수 있다. 

역사와 문화유적을 최대한 소중히 보존하려는 베를린 사람들의 노력은 베를린을 더욱 풍요로운 예술과 학문의 도시로 만들어가고 있다. 한겨울의 베를린에서 나는 과거의 빛, 현재의 빛, 미래의 빛을 모두 한꺼번에 경험하고 있었다.  
글·정여울 『감수성 수업』,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저자
사진·이승원 『학교의 탄생』, 『세계로 떠난 조선의 지식인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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