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시골 장터를 기행 하던 때가 있었다. 어떤 잡지사의 기획이었다. 허름한 여관방에서 눈을 붙이고 새벽에 나갔다. 무릇 시장의 진풍경은 새벽, 그러니까 사람들의 일상 시간 이전에 이루어진다. 아직 컴컴한 박명의 시간에 아낙들이 함지를 이고 자리를 잡는다. 남도의 오일장이란 대체로 그랬다. 겨울 장이 특히 혹독했다. 짠 내 섞인 해풍이 사납게 불었다. 겨우 머플러와 모자로 한기를 막으며 아낙들은 늘어놓은 채소며 해물을 파느라 목청을 높였다. 나 같은 이방인은 느긋하였는데, 어느 순간 마음을 후려치는 파장이 몰려왔다. 그 추운 노점에서 아낙 서넛이 모여 끼니를 때우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주섬주섬 찬을 내고, 싸 온 밥을 밀어 넣는 장면이 막 떠오르는 겨울 해를 배경으로 펼쳐질 참이었다. 내가 생각한 건 그저 신파였으리라. 몸을 웅크리고, 찬밥을 겨우 욱여넣는 쓸쓸한 서정을 겨냥했으리라. 뜻밖(?)에도 아낙들은 힘차고 씩씩하게 숟갈질을 했다. 농담을 나누며 폭소를 터뜨리기도 하면서. 그 밥은 에너지의 밥이었고, 삶의 밥이었다. 낙관의 밥이었다. 추운 장날 새벽에도 밥의 힘이 그날 있었다.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 했다. 왜 아니랴. 흰 쌀밥, 그러니까 이밥이라 부르는 달콤하고 윤기 흐르는 밥을 향한 갈망이 우리 민족 정서에 뼈대가 되어주었다. 밥 한 그릇 따뜻하게 먹는 일을 최고의 복, 즉 지복(至福)이라 했다. 일제강점기에 북간도로 떠나는 이주민들이 제일 소중하게 보듬고 갔던 것도 볍씨였다. 그 추운 북쪽 지방에서도 기어이 쌀밥을 만들어낸 것이 우리 선조였다. 원래 그 지역은 밀 재배가 되고 쌀은 안 된다 하였다. 너무 추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어이 볍씨를 틔운 것은 우리 선조 이주민이었다. 지금도 그 지방은 밥을 즐겨 먹는다. 돌이켜 보면, 오래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저승 노잣돈과 함께 상에 차려진 것도 쌀밥이었다. 밥으로 시작해서 밥으로 마치는 게 한국인이다. 아버지는 아마 저승에서도 쌀밥을 드시고 있을 것이다. 제삿날이면 우리가 밥을 짓기 때문이다.
서양은 밥 대신 빵이다. 민중들이 분노하여 빵을 달라고 외치는 건 혁명이었다. 누구나 고급스러운 흰 빵을 먹는 세상이 프랑스혁명이 가는 길이었다. 회사를 영어로 company라고 한다. 이 말은 com(같이)과 pany(빵)의 조어다. pany는 pan, 즉 ‘빵’이다. 빵을 같이 나누는 게 컴퍼니다. 이제는 더 많은 빵을 벌기 위해 모인 조직을 뜻한다. 빵은 금이고 코인이고 화폐가 되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모두 결국은 밥과 빵을 바꾸는 데 쓰는 대리물이다. 우리는 영원히 빵과 밥 안에서 산다.
우리는 밥 앞에 모두 공손하다. 아니, 공손해져야 한다. 그런 밥이 이제는 예전 같지 않다. 밀가루와 간식을 즐기는 시대다. 밥은 탄수화물이라 경원시하는 경우도 많다. ‘저탄고지’의 시대에 밥은 멀리 밀려난다. 입안에 밀어 넣고 뜨거운 김을 후후 불어가며 씹으면 다디단 즙이 나오던 밥의 기억이 점차 사라지는 것일까. 그래도 여전히 밥은 우리를 지킨다. 밥 한술의 힘으로 하루를 견딘다. 밥벌이의 고단함도 역설적으로 밥으로 버티는 셈이다. 여러분들도 한 끼, 밥 한술 잘 뜨시고 힘차게 보내시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