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SF, 판타지는 어린아이나 보는 책이라는 편견이 강할 때가 있었다. 요즘엔 사정이 조금 달라진 듯하다. 현재 전 세계의 유명한 SF 작가 가운데 한 명이자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컨택트>의 원작 작가이기도 한 테드 창은 세계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기업인들이 모인 행사에서 연사로 부를 정도로 각광 받는다.
테드 창보다 훨씬 유명한 작가로는 스티븐 킹이 있다. 킹은 읽고 나면 두고두고 머릿속에 남는 단편을 잘 쓰는 작가로도 유명하다. 그런 단편 가운데 「폭력의 종말」이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 속 과학자는 세계 곳곳에서 폭력이 끊이지 않는 현실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이 폭력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결국 그 과학자는 마치 폭력이 없어진 듯한 평화로운 오지 마을의 식수원에서 사람의 폭력성을 제거하는 화학 물질을 발견한다. 이 화학 물질을 전 세계 곳곳에 살포하면 세상의 폭력이 사라지지 않을까? 이 소설은 그 물질을 세상에 뿌리고 나서 벌어진 뜻밖의 결과를 독자에게 보여준다.
처음부터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외면하는 독자가 있을 테니 얼른 과학 이야기로 돌아가자. 만약 현실에 존재하는 여러 화학 물질 가운데 폭력을 줄이는 물질의 후보를 꼽으라면 가장 먼저 떠올릴 법한 게 ‘옥시토신’이다. ‘어, 어디서 들어봤는데?’ 하고서 고개를 갸우뚱한다면 고등학교 과학 시간에 공부를 열심히 했던 사람이다.
모성 호르몬, 사랑 호르몬
옥시토신은 흔히 자궁 수축 호르몬으로 알려진 체내에서 나오는 화학 물질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여성이 아이를 낳을 때 자궁을 자극해서 수축하게 하고, 또 아이를 낳고 나서 모유가 잘 나오도록 돕는 호르몬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옥시토신은 점점 그 위상이 올라가 ‘사랑 호르몬’이라는 별명까지 갖게 된다.
우선,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 암컷의 출산과 모유에 영향을 주는 이 호르몬이 행동에도 영향을 준다는 증거가 쌓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출산을 하지 않은 암컷 쥐의 체내에 옥시토신을 주입하면 그 쥐는 다른 새끼에게 다가가서 털을 고르고 핥아주는 것과 같은 모성 행동을 한다. 출산한 쥐의 옥시토신 분비를 방해하면 그 쥐는 수유를 포함한 모성 행동을 그만둔다.
쥐를 상대로 한 실험 결과는 원숭이, 나아가 인간 여성을 상대로도 그대로 나타났다. 인간 여성의 코안에 옥시토신을 뿌리면 그 여성은 아기를 더 사랑스럽게 느낀다. 실제로 체내 옥시토신 분비가 많은 여성은 자기 아기를 만지고 눈을 맞추는 모성 행동을 더 많이 한다. 옥시토신이 ‘모성 호르몬’이 되는 순간이다.
호기심 많은 과학자가 여기서 만족할 리 없다. 혹시 옥시토신은 엄마뿐만 아니라 아빠한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원숭이 수컷부터 시작해서 인간 남성을 대상으로 조심스럽게 옥시토신이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했다. 수컷, 즉 남성은 이성과의 친밀감이 높을 때 체내의 옥시토신 농도가 높아졌다.
커플이 처음 사귀기 시작할 무렵 체내의 옥시토신 농도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도 높아졌다. 커플이 충돌할 수밖에 없는 과제를 제시하고서 옥시토신을 그들의 코에 뿌리면 갈등도 적었고 스트레스를 받을 때 나오는 호르몬의 분비량도 적었다. 심지어 옥시토신은 인간 남성의 바람기를 잡는 데도 영향이 있었다.
이성애자 남성에게 (보통 남성이 매력적이라고 여기는 특징을 가진)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게 했다. 옥시토신을 뿌렸을 때 임자가 있는 커플 남성은 싱글과 비교할 때 그 여성과 대화하면서 거리를 뒀다(평균 10~15센티미터). 또 옥시토신을 뿌리면 커플 남성은 매력적인 여성의 사진을 보여줘도 주목하는 시간이 짧았다. 옥시토신이 자기 애인, 아내에게 그를 묶어준 것이다.
집에 반려견이 있는 독자에게 반가운 실험 결과도 있다. 개와 그 주인이 상호작용할 때, 둘 다 옥시토신을 분비한다. 양쪽이 상호작용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옥시토신 분비량도 늘어난다. 키우던 반려견이 무지개다리를 건너면 친가족을 잃은 것만큼 슬픈 데는 옥시토신이 묶어준 소속감도 영향을 줬을 테다.
이쯤 되면 옥시토신을 ‘모성 호르몬’이 아니라 ‘사랑 호르몬’이라고 불러도 될 듯하다. 좀 더 욕심을 내자면 옥시토신 스프레이를 집안 잘 보이는 곳에 두고 수시로 뿌려대고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런데 마냥 좋은 효과만 있어 보이는 옥시토신에 숨겨진 반전이 있었다. 옥시토신의 배신이다.
옥시토신의 배신
앞에서 살폈듯이 옥시토신은 내 새끼에게 한없이 관대한 행동을 유도하는 호르몬이다. 그런데 내 새끼가 위험해지면 어떻게 될까? 옥시토신은 자기 새끼를 보호하려는 엄마의 공격성을 강화한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에서 엄마(김혜자)가 아들(원빈)을 보호하고자 동분서주할 때 그녀의 몸속에는 분명히 옥시토신 농도가 높았을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옥시토신은 내 새끼뿐만 아니라 내 편에게도 똑같이 작용한다. 예를 들어 우리 편(‘우리가 남인가?’)의 경우에 옥시토신은 애정, 신뢰, 협동 그리고 관대한 행동으로 이어졌다. 반면 낯선 사람(‘처음 봤는데?’)에게는 오히려 적대, 불신, 배신 그리고 공격적 행동을 유도했다.
충격적인 실험 결과도 있다. 옥시토신을 뿌린 네덜란드 학생을 상대로 이렇게 질문을 던졌다. ‘다섯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한 사람을 죽여야 하는데 결정하세요!’ 죽어야 할 한 사람의 이름을 전형적인 네덜란드식, 독일식, 중동식으로 제시했다. 우리나라에서 실험했다면 한국식, 일본식, 동남아시아식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결과는 어땠을까?
옥시토신은 네덜란드 학생이 네덜란드식 이름을 가진 사람은 덜 희생시키는 쪽으로, 독일식이나 중동식 이름을 가진 사람은 더 희생시키는 쪽으로 유도했다. 옥시토신은 ‘내 새끼’와 ‘우리 편’에게는 애정을, ‘남의 새끼’와 ‘다른 편’에게는 증오를 유도한다.
이렇게 옥시토신은 ‘사랑 호르몬’이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증오 호르몬’이 될 수도 있다. 앞에서 얘기하지 않은 옥시토신의 효과가 하나 더 있다. 옥시토신은 평소 선입견 없었던 중립적인 상대의 호감도를 높인다. 상대를 좀 더 신뢰하게 하고, 거짓말도 너그럽게 용서한다. 성경식으로 말하면,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을 내밀게 한다.
만약 그 상대가 따뜻한 미소 뒤에 배신할 마음을 숨기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 옥시토신은 보통 사람을 타인을 무한 신뢰하는, 거짓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사기에 당하는 바보로 만든다. 농담을 섞어서 말하자면 출근하는 남편의 코에 옥시토신을 뿌리면 아내나 아이를 생각하는 시간은 늘겠지만, 밖에서 사기를 당해서 집안경제를 파탄시킬 수도 있다.
스티븐 킹이 이런 옥시토신 연구 결과를 알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글머리에 언급한 단편의 결말이 놀랍도록 비슷하다. 그 과학자가 전 세계에 살포한 화학 물질 덕분에 폭력은 줄었다. 하지만 그 부작용으로 전 세계 사람이 점차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바보가 된다. 이 소설이 실린 책의 제목이 바로 『종말 문학 걸작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