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정책은 경기 둔화에 큰 타격을 받는 취약계층을 보호하는 막중한 역할을 수행해야 하지만, 단기적인 경기 부양책이 과도하게 지속돼 구조적인 문제를 고착화하는 일은 없도록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KDI를 비롯한 주요 경제 전망 기관들이 우리나라의 2025년 성장률 전망치를 잇따라 하향 조정하고 있다. 미국의 관세정책에 따른 글로벌 통상 환경 악화로 우리 경제의 핵심 성장동력이었던 상품 수출의 성장세도 둔화될 전망이다. 또한 고금리 기조가 이어지는 가운데 정국 불안까지 겹치면서 가계 심리가 위축되고 민간 소비 회복이 지연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경기 대응을 위한 정책금리 인하나 추경 편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고용 안정성 높은 우리나라,
미국보다 중장년층 근속연수가 짧다?
눈앞에 급한 문제가 발생하면 그 원인을 파악하기에 앞서 당장의 현상에 집중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 경제의 성장 둔화가 어제오늘 일이 아닌 만큼 최근의 어려움이 단기적인 요인뿐만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단기적인 경기 부진을 완화하기 위한 재정정책은 구조적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장기적으로 그 문제를 심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후 우리나라의 기대수명은 지속적으로 증가해 왔다. 다른 국가에 비해 매우 빠르게 연평균 약 0.4세씩 상승했으며, 이는 OECD 국가들의 평균 증가 속도인 0.2세의 두 배에 달한다. 기대수명의 증가는 의료기술 발전과 생활수준 향상에 따른 긍정적인 변화로 볼 수 있지만, 노동시장과 사회구조가 이에 따라 적절히 변화하지 못하면 여러 가지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특히 기대수명이 늘어나더라도 일할 수 있는 기간이 충분히 확대되지 않는다면 노후를 대비하는 부담이 가중될 수밖에 없으며, 이에 따라 소득이 발생하더라도 소비로 연결되기 어려워져 구조적인 소비 부진이 발생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점은, 고용 안정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진 우리나라가 오히려 해고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미국보다 중장년층 임금근로자의 근속연수가 짧다는 것이다(한요셉, 「중장년층 고용 불안정성 극복을 위한 노동시장 기능 회복 방안」, 2024). 이는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역설적인 현상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중년 이후 비정규직 근로자의 비중이 빠르게 증가하는 것이 주요 원인처럼 보이지만, 그 근본적인 배경에는 과도한 연공서열형 임금 구조가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연공서열형 임금체계는 근속연수가 길어질수록 임금이 상승하는 구조다. 이는 젊은 시절 낮은 임금을 감수하더라도 장기적으로 고임금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를 전제로 유지돼 온 시스템이다. 그러나 기업 입장에서는 생산성과 임금 간의 괴리가 커지는 중장년층 노동자를 부담으로 인식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이에 따라 정년까지 고용을 유지하기보다는 조기퇴직을 유도하거나 비정규직 전환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게 된다. 기대수명이 증가하고 있음에도 구조적인 요인으로 중장년층의 근속연수가 확대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적 요인은 추경을 통한 소비 진작 정책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딥시크로 AI산업 지원 필요성 대두···
과도한 재정이 혁신 막고 있었을 수도
이뿐만이 아니다. 정책금융은 금융시장에서 정보 비대칭으로 인해 나타날 수 있는 시장 실패를 보완하는 중요한 수단이지만, 과도한 정책금융이 지속될 경우 오히려 경제 역동성을 저해하고 신산업으로의 전환을 지연하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한계 기업이나 경쟁력이 떨어진 전통 산업이 과도한 정책금융에 의존할 경우 생산성이 높은 신산업으로 자원이 이동하지 못하고 기존 산업에 묶이게 된다. 이는 신산업이 성장할 공간을 제한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으며 기업의 혁신 동기를 약화할 가능성도 있다. 정책금융이 특정 산업에 지속적으로 공급될 경우 기업들은 경쟁력을 자생적으로 키우기보다 정부 지원에 의존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정책금융이 기존 산업 보호에 집중될 경우 신산업의 진입 장벽이 높아질 수 있다. 전통 산업에 대한 금융 지원이 많아질수록 해당 산업 내 기업들은 상대적으로 낮은 비용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된다. 반면 신산업에 속한 스타트업이나 혁신 기업들은 상대적으로 불리한 환경에서 경쟁해야 하며 충분한 자금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이는 신산업의 성장을 저해하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딥시크(DeepSeek) 충격으로 AI산업에 대한 적극적인 재정 지원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지금, 기존 산업에 대한 과도한 재정이 새로운 분야의 혁신 기회를 막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거시정책의 효과를 분석하는 경제학은 매우 복잡해 보이지만 그 본질은 비교적 명료하다. 우리 사회에서 자원의 이동이나 조정이 원활하게 이뤄지는 것을 방해하는 요인을 파악하고, 그것이 야기하는 비효율에 가장 효과적이며 효율적인 대응 방식을 찾는 것이다. 교과서에나 존재하는 이상적인 상황이겠지만 이 세상에 어떤 마찰적 요인(friction)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정부의 재정정책이나 중앙은행 통화정책은 중요성이 급감하며 오히려 때로는 개별 경제주체의 인센티브를 왜곡해 비효율적인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 마찰적 요인이 없다면 외부 환경 변화에 따라 시장을 통해 자원 배분이 효율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은 완벽하지 않아서 곳곳에 마찰적 요인이 존재하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다양한 거시정책이 필요하다. 다만 대부분의 재정정책은 재정의 비용을 주로 부담하는 주체와 재정의 사용으로 인한 혜택을 주로 보는 주체가 다르기 때문에 경제주체의 주요 결정을 왜곡하고 그 결과 우리 사회의 비효율을 야기할 수 있는 부작용이 따른다. 따라서 대규모 재정정책은 시행하기에 앞서 이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해야 한다.
경기 둔화는 취약계층에 가장 큰 타격을 준다. 재정정책은 이들을 보호하는 막중한 역할을 수행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과도해 단기적인 경기 부양책이 구조적 문제의 고착화를 야기하는 일은 없도록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성급한 정책보다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지속 가능한 경제 회복을 위한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