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놀이터는 ‘건축가’의 설계 대상이 아니었다. 주로 공원계획의 일부로서 조경가에 의해 배치되고 그 구체적인 구조물은 놀이터 업체가 개발해 놓은 여러 모델 중에서 선정·배치되곤 했다. 그러다 보니 어디에나 있는 미끄럼틀, 그네, 트램펄린 등이 알록달록 놓여 있는, ‘장소성’ 없는 놀이장소가 되곤 했다. 이런 배경에서 2010년대 중반부터는 해외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건축가가 참여해 그 장소만의 놀이터를 만드는 경우가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
지형 그대로의 흙 언덕 위에 지어진
‘건축’으로서의 놀이터
세계 유수의 대학인 하버드, MIT 등이 위치한 미국 보스턴에는 많은 대학생과 학자가 활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도시의 어린이들은 어떤 환경에서 자라고 있을까. 사람들은 보통 보스턴을 방문해 유명 대학과 박물관, 역사적 장소들을 둘러본다. 그곳의 다음세대가 자라나는 환경을 눈여겨보는 경우는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보스턴은 학문적으로 새로운 연구와 시도가 일어나는 만큼 놀이풍경에서도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고 있다.
2016년 여러 건축 어워드의 ‘작은 구조물’ 분야에서 수상을 한 프로젝트가 있었다. 그것은 주택이나 파빌리온(이동이 가능한 작은 건축물) 같은 흔한 건축물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활발하게 뛰놀고 어울리는 놀이터를 위한 구조물이었다. ‘파이브 필드 놀이구조물(Five Field Play Structure)’이라고 이름 붙은 이 놀이풍경은 기존의 놀이터 개념에서 만들어진 놀이기구가 아닌 공간을 다룬 건축이라고 할 수 있다.
보스턴의 매터 디자인(Matter Design)에서 설계한 이 놀이구조물은 기존 놀이터의 개념에서 보면 생경하기 이를 데 없다. 기성 놀이기구는 찾아볼 수 없고 목재로 만들어진 다양한 비율의 박스형 공간들이 하나의 벽 구조체에 여러 개 붙어 있을 뿐이다. 하늘을 볼 수 있는 공간, 경사진 땅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공간, 기어 올라갈 수 있는 공간, 멀리 짚라인을 타고 갈 수 있는 공간 등 건축적 요소들이 재미있는 공간감을 주면서 자연과 잘 어우러진다.
이곳은 일반에 공개된 공원이 아니라 단독주택지가 모인 커뮤니티 내에 있다. 기존의 미끄럼틀, 그네 등이 오래되고 녹슬어 커뮤니티에서 새로운 기성 놀이기구를 사다 설치하려던 것을 이곳에 살고 있던 건축가 마이클 샨바처(Michael Schanbacher)가 주민들을 설득하고 세상에 없던 놀이터를 직접 설계해 만든 것이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던 주민들도 이 동네만의 특별한 놀이풍경에 아주 만족해한다고 마이클을 직접 만났을 때 그가 전해주었다.
바닥이 흔한 탄성고무나 모래가 아니라 지형 그대로의 흙 언덕이어서 특별한 안전장치가 없는데, 이를 두고 마이클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어느 위치에서 떨어지면 다치는지 아이들 스스로 알 필요가 있어요. 다행히 이곳은 공공에 개방된 곳이 아닌 커뮤니티 내에서 사적으로 쓰이는 곳이라 주민들이 서로서로 보살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유리합니다.” 이는 우리나라 놀이터 관련 법상으로는 허용되지 않는 부분이긴 하다. 물론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이긴 한데, 아이들의 놀이가 꼭 놀이터라는 법적 공간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기에 일반 건축구조물의 일종으로 지어진 이런 곳도 아이들의 놀이공간으로 존재할 수 있다.
놀이터의 천국 싱가포르···놀이기구는 없고 박스만?
일본 나라시에는 특별한 기차역 광장이 있다. 텐리 기차역 앞의 광장 코푸펀(COFUFUN)은 디자인 그룹 넨도(Nendo)가 설계한 복합 구조물로, 일반적인 상업시설이나 공공 공원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거대한 놀이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나라시가 역사 도시여서 도시 내 곳곳에 위치한 고분군과 주변 산지에서 영감을 얻은 하얀색 콘크리트로 인공적인 산과 분지를 표현했다. 디자인 언어는 모두 백색과 원형으로 통일돼 있고 계단식 단을 갖고 있어 강력한 정체성을 표현하며, 황량할 수 있는 역 앞 광장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원추형의 계단식 구조물들에는 각각 분화구같이 움푹 파인 목재 마감의 재미난 공간과 대형 원형 테이블, 기념품 상점과 카페 등 상업시설이 배치돼 있다. 원형 접시같이 생긴 계단식 구조물은 거대한 트램펄린, 야외 공연장 등이 들어선 복합 시설이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이곳은 어린이만을 위한 놀이터는 아니다. 놀이의 요소가 있긴 하지만 남녀노소 누구나 각자의 목적대로 이용할 수 있는 시민공간이다. 실제로 점심시간에는 주변 직장인들이 도시락을 들고 나와 구조물의 일부인 커다란 원형 콘크리트 테이블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기도 했다.
이처럼 강력한 모티브로 구성된 놀이풍경은 아주 복잡하고 다양한 형태가 아니더라도 주변의 도시 맥락과 함께 어우러져 활기 있는 놀이공간이자 활동공간으로서 장소적 기억을 오래 남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작은 도시국가 싱가포르는 놀이터의 천국이다. 놀이터 숫자가 많아서라기보다는 커뮤니티 디자인에 대한 단단한 의지로 세워진 놀이터들이 곳곳에 있고, 그 역사가 도시의 발전과 고스란히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놀이터 업체가 만든 일반적인 놀이터의 수준도 상당하지만 건축가나 디자이너가 특별하게 설계한 놀이풍경 또한 그 도시의 건축과 개념적·재료적으로 연결되며 장소성을 더 뚜렷하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중에서도 인터레이스(Interlace)라고 하는 독특한 주거 단지가 있다. 이곳은 네덜란드의 유명 건축가 렘 콜하스(Rem Koolhaas)가 이끄는 건축회사 OMA가 설계했다. 이 단지 안에도 우리나라 아파트처럼 놀이터가 있다. 네덜란드의 놀이터 디자인 그룹인 카르베(Carve)에서 디자인한 이 놀이터는 일반적인 놀이기구로 채워진 것이 아니라 주거 단지 형태를 모티브 삼아 박스들을 엇갈려 쌓은 형태로 구성됐다. 이곳의 주거 단지는 기존 아파트처럼 수직 타워가 아니라 옆으로 긴 5~6개 층의 주거동이 테트리스 쌓듯 배치돼 있는데, 인터레이스 놀이터도 땅에 박힌 개별 놀이기구에서 노는 것이 아니라 내부가 비고 옆으로 긴 박스들을 관통하고 매달리고 올라가며 놀 수 있게 돼 있어서 좀 더 3차원적인 공간 탐험이 가능하다.
우리의 놀이터 중에 그 동네, 도시와 함께 기억나는 곳은 어디인가? 꼭 독특한 형태여야 한다기보다 단순해도 그 지역의 장소성과 어울리는 우리만의 놀이풍경을 위해 필자를 비롯한 여러 건축가가 고민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