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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글로벌 비즈니스 리포트미국이라는 코끼리는 얼마나 빨리 달릴 수 있을까?
김태룡 전 KOTRA 실리콘밸리무역관 차장 2025년 04월호
미국이라는 나라를 동물로 비유한다면 어떤 동물일까? 개인적으로는 현재 정권을 잡은 공화당의 상징 때문이 아니더라도 넓은 영토와 거대한 인구, 어마어마한 소비력에 지상에서 가장 덩치 큰 동물인 코끼리가 떠오른다. 그리고 3년 전 내가 미국 실리콘밸리무역관으로 부임하며 주변 선배와 유학 경험자들에게 들은 미국 정착 경험담은 동물원에서 본 코끼리와 같은 느긋함을 넘어 답답함으로 가득했다.

혁신의 중심지에서 만난 
코끼리처럼 무거운 행정 시스템


대표적인 것은 바로 사회보장번호(SSN) 발급이었다. 미국에 정착하려면 우리의 주민등록번호와 비슷한 사회보장번호가 필요하다. 이 번호가 없으면 은행 거래나 운전 등 기본적인 생활조차 어렵다.

이를 받기 위한 사회보장국 사무소 방문은 꽤 악명이 높았다. 예약을 위해 여러 차례 전화해야 하고 예약 후 방문해도 긴 줄을 기다린 뒤 공무원이 요구하는 까다로운 서류들을 제출해야 한다. 그 후에도 사회보장번호 카드는 바로 나오지 않는다.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우편물을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한다.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는 이런 이야기들이 미국에 가본 적 없는 나를 겁주기 위한 선배들의 농담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2022년 2월, 미국에 도착해 보니 현실은 듣던 것 이상이었다. 당시 사회보장국 방문 예약은 정말 전화로만 가능했는데 문제는 전화 연결조차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회보장국 방문 예약까지 약 3주 동안은 시간 날 때마다 전화를 거는 것이 일과였다. 그렇게 힘들게 방문하니 예약을 했는데도 긴 줄을 기다려 보안검색대를 통과해야 했고, 창구에 가서는 현장에서 추가로 요청받은 서류를 제출하기 위해 다시 방문해야 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사회보장번호 카드를 받아 본 순간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돌이켜 보면 이처럼 느리고 답답한 미국 행정은 사실 과거에도 악명이 높았겠지만 코로나 엔데믹과 함께 현장 인력 복귀가 지연되는 가운데 밀린 행정수요가 일시에 몰려 벌어졌던 특수한 상황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당시 경험은 미국과 전 세계 혁신의 상징이라 불리는 실리콘밸리에 대한 기대를 무너트리기에 충분했다. 

정착에 대한 경험담 외에도 많이 들었던 무서운 이야기는 비싼 의료비와 힘든 병원 예약이었다. 앞서 사회보장번호 카드 발급 과정에서 호되게 당한 이후 선배들의 경험담을 무시하지 못하던 내게 첫 병원 방문은 피할 수 없는 두려운 과제였다.

미국에서는 한국처럼 아무 병원에서나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어 가입한 의료보험을 받아주는 곳을 검색하거나 일일이 전화하며 찾아야 했다. 조건에 맞는 가까운 병원을 찾기도 힘들고 적합한 병원을 찾더라도 새로운 환자가 예약 가능한 날짜는 거의 없었다.

당장 진료가 급했던 내게 유일한 선택지는 병원비가 무시무시하게 나온다는 응급실이 아닌 보험사 카드 뒤에 적혀 있던 원격진료서비스였다. 그런데 이 강제된 원격진료 경험은 미국의 여러 시스템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던 나의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앞서 병원을 찾기 위해 고생했던 것이 무색하게 별도의 예약 없이 원격진료 앱에서 원하는 진료 분야와 인종, 언어 등 관련 사항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과거 진료기록과 증상을 보내고 나니 30분이 채 되지 않아 내가 위치한 캘리포니아 반대편인 미국 동부 보스턴의 한국계 의사가 연결됐다. 통화도 아닌 간단한 채팅 이후 바로 처방전을 받을 수 있었다. 약을 받는 과정도 인상적이었는데, 같은 앱으로 원하는 위치의 약국을 지정하면 처방전이 자동으로 전달돼 내가 할 일은 지나가는 길에 들러 이름과 생일을 말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 과정을 현지에서 오래 지낸 지인에게 공유하니 자기는 같은 약 처방이었는데도 1차, 2차 진료를 거쳐 겨우 받았고 다시 처방전을 받기 위해 일주일 뒤 병원 예약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되물어 보며 해당 의료서비스 정보를 부탁했다. 그만큼 현지에서도 새로운 시스템이었다. 
 

이방인의 눈에 더 잘 보였던 변화들과
기회를 놓치지 않는 미국시장의 힘


미국의 전반적인 사회 시스템 변화는 동물원 코끼리처럼 느릿해 보였다. 하지만 2022년 9월 엔데믹 선언 이후 지난 3년간 미국이라는 코끼리는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의외로 현지에서 오래 지낸 사람보다는 나 같은 이방인의 눈에 더 잘 보였다.

내가 3년 전 경험한 사회보장번호 발급은 이제 전화 예약이 아닌 온라인 예약으로 진행된다. 서류도 사전에 온라인으로 제출할 수 있다. 운전면허 필기시험은 집에서 온라인 시스템으로 볼 수 있으며 그 밖의 관공서에서도 복잡한 종이 서식에 직접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홈페이지나 현장에 설치된 컴퓨터에 간단히 입력하는 것으로 대체됐다. 

물론 여전히 우편으로 중요 서류가 도착하고 큰 금액은 수표를 사용하는 등 변화가 더딘 부분도 있지만 행정에서 의료, 금융에 이르기까지 많은 곳에서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특히 대표적인 것은 의료 분야인데 내가 첫 원격진료를 경험하고 2년이 조금 안 되는 사이 보험사, 병원, 약국이 긴밀하게 연결되며 비용 처리와 환급 과정도 간소화됐다. 일반 진료의 경우엔 현지 대학과 협력해 예약에서 진료, 의료비 지급, 이력 확인까지 앱으로 간편하게 할 수 있게 됐다. 

그토록 답답하게만 느껴졌던 미국 시스템의 빠른 변화는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가시화된 수요를 빠르게 포착하고 반응한 시장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행정과 의료에 대한 불만은 언제나 존재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본격적으로 표출되지 못하다가 코로나19라는 특수 상황이 잠재된 수요를 눈에 보이는 시장으로 끌어냈다. 안전한 환경에서 근무하길 원하는 공무원의 재택수요는 대면으로 진행되던 행정업무의 전산화로 이어졌고, 위급 환자와 감염에 대한 대처가 어려웠던 의료 분야에서는 원격진료가 확산됐다. 

그 과정에서 미국시장의 자본과 인재들은 경제적 이익이라는 과실을 얻기 위해 발 빠르게 대응했다. 특히 실리콘밸리는 이런 과정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지역 중 하나로, 현지 유수의 대학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인재들이 몰려들어 소비자가 원하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고 벤처캐피털들은 막대한 자본으로 이를 뒷받침했다. 그 결과 정체돼 있던 행정과 의료 분야는 단기간에 큰 변화를 이뤄낼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같이 큰 소비시장도 풍부한 자본도 없지만 기회를 포착하는 데는 어느 나라보다도 빠르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이미 오래전에 미국과 비교할 수 없이 편리한 전자정부 시스템을 구축했고 팬데믹 기간에도 민첩하게 관련 체계로 대응했다. 다만 아쉬운 부분은 이런 서비스가 더 큰 시장을 만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이미 많은 기업이 해외시장을 두드리고 있고 정부와 코트라를 비롯한 다양한 지원기관은 해외에서 우리 기업들을 돕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이제 막 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기업과 청년들도 국내가 아닌 해외시장을 먼저 두드리는 경우가 늘고 있어서 고무적이다. 

최근 만난 한 기업 관계자도 한국에서 부족한 시장을 동남아 등 다른 아시아시장에서 찾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얻은 수많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미국 실리콘밸리 빅테크 기업을 고객으로 삼아 미국 진출을 본격화하고 있었다.

작은 시장에서는 고객도 기회도 한정돼 있지만 우리가 그 한계를 벗어나 끊임없이 새로운 시장을 두드린다면 달리는 코끼리 등에 올라타고 더 멀리 더 빠르게 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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