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 많은 사람이 놀랐던 가슴 아픈 소식이 있었다.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대만판 여주인공으로 유명했던 배우 쉬시위안(서희원)이 일본 여행 중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떴다. 쉬시위안과 한국 가수 구준엽의 오랜 시간에 걸친 영화 같은 로맨스가 몇 년 전에야 결혼으로 이어진 상황이라서 더욱더 마음 아파하는 팬이 많았다.
새삼 어두운 소식을 언급한 이유는 40대 후반으로 아직은 한창때인 쉬시위안의 생명을 앗아간 주범이 이번 호에 얘기할 소재와 맞닿아 있어서다. 국내 언론은 대부분 쉬시위안이 폐렴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폐렴은 말 그대로 사인일 뿐이고 진짜 그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폐렴을 일으킨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였다. 즉 쉬시위안은 독감으로 세상을 떴다.
지난겨울에 유난히 독감 유행이 심해서 이 글을 읽는 독자와 가족 가운데도 분명히 심하게 앓은 경험자가 있을 테다. 다행히 대다수 건강한 성인은 며칠 고생하고 나면 회복한다. 하지만 노인이나 어린아이는 독감이 폐렴으로 이어져 사망하는 경우가 많다. 드물게는 쉬시위안처럼 건강한 성인도 목숨을 잃는다. 계절 독감이 무서운 이유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지금 전 세계 감염병 전문가 다수가 걱정하는 새로운 팬데믹의 주인공도 독감의 원인인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신종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호시탐탐 새로운 숙주(인간)를 노리면서 돌연변이를 일으키고 있다. 그 강력한 후보 가운데 하나가 H5N1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다.
인간을 공격하는 조류독감
1997년 5월 21일, 세 살 남자아이가 홍콩의 한 병원에서 목숨을 잃었다. 평소 건강하던 이 아이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감염으로 보이는 고열 증상으로 병원에 입원한 지 5일째부터 바이러스성 폐렴이 시작됐고 결국 목숨을 잃었다. 홍콩 방역 당국은 그 소년에게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확인했지만 과거 유행했던 것과는 다른 신종이었다.
차차 섬뜩한 사실이 하나씩 확인됐다. 애초 그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닭과 오리에서 발견됐던, 그래서 조류 인플루엔자라고 불렀던 H5N1과 같은 종류였다. H5N1이 조류와 포유류의 종 간 장벽을 뛰어넘어 인간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1997년 5월 이후 H5N1 바이러스는 세계 이곳저곳에서 인간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현재까지 치명률은 약 50%다.
감염자의 절반이 목숨을 잃는 무서운 바이러스인데 왜 이렇게 생소할까? 아직 H5N1 바이러스는 인간의 호흡기에서 다른 인간의 호흡기로 옮겨가는 능력은 획득하지 못했다. 현재까지 감염자의 대다수도 직접 닭이나 오리를 접하는 가금류 농장 노동자다. H5N1 바이러스의 대규모 유행이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점점 상황이 나빠지고 있다. 지난해부터 닭이나 오리가 아니라 (인간과 같은) 포유류인 젖소에게 H5N1 바이러스가 퍼져 미국 등에서 비상이 걸렸다. 심지어 감염된 소에서 짠 생우유를 마신 고양이가 이 바이러스에 걸려 죽는 일도 있었다. H5N1 바이러스가 인간, 소, 고양이 등 포유류를 무차별로 공격하고 있다.
전 세계의 많은 감염병 전문가가 걱정하는 것은 이렇게 조류와 포유류를 가리지 않고 H5N1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그것이 어느 순간에 돌연변이를 일으켜 인간의 호흡기로 퍼지는 능력을 획득하는 일이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2020년부터 시작한 코로나19 팬데믹에 버금가는, 혹은 그 이상의 재앙이 인류를 덮칠 수 있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어떻게 돌연변이를 일으킬까? 지금도 전 세계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수많은 철새는 다양한 종류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품고 있다. 이들 철새는 오랫동안 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와 동거한 덕분에 아무런 해를 입지 않는다. 철새도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도 죄가 없다.
여기서 인간이 개입한다. 철새를 포함해 닭, 오리 같은 조류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호흡기가 아닌) 소화기에 품고 있다가 배설물로 내놓는다. 어떤 사람이 장화를 신고 철새 서식지를 다니다가 자기가 일하는 농장으로 돌아가면 다양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고스란히 그곳의 닭, 오리에게 전파된다.
철새의 몸 안에 조용히 있었던 조류 인플루엔자 입장에서 닭, 오리 농장은 새로운 숙주로 가득한 천국이다. 다양한 조류 인플루엔자가 이중삼중으로 닭, 오리를 감염시키고 나서 그 몸속에서 서로 특징을 교환하면서 변이를 일으킨다. 마침 그 농장에 돼지 같은 포유류까지 있으면 상황은 더욱더 심각해진다. 돼지 몸속에서 포유류를 감염시켰던 바이러스와 만나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 이런 인플루엔자 사이의 교잡을 일으키기 가장 좋은 공간을 딱 하나만 꼽으라면 중국과 동남아시아 곳곳에 있는 야생 동물 시장이다. 닭, 오리, 소, 돼지뿐만 아니라 철새를 포함한 온갖 야생 동물을 살아 있는 상태로 이중삼중의 우리 안에 넣고서 손님을 맞는 이런 시장에서는 이 순간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돌연변이가 일어나고 있다.
H5N1 바이러스도 1997년 5월 이전 어떤 시점에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쳤다. 애초 야생 철새에서 농장의 닭이나 오리로 옮겨졌고, 그다음에 돼지와 같은 포유류의 몸속에서 종 간 장벽을 넘어서는 능력을 획득하는 돌연변이를 일으켰다. 이 바이러스가 포유류(인간)의 호흡기에서 호흡기로 전파하는 능력을 획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어느 정도나 될까?
인플루엔자 팬데믹을 대비하는 방법
H5N1뿐만이 아니다. 역시 애초 닭, 오리를 감염시켰던 H7N9 바이러스도 2013년 3월 중국에서 인간을 공격하기 시작해 현재까지 치명률 약 30%를 기록하고 있다. 다행히 이 바이러스도 지난 겨울에 유행한 계절 독감처럼 인간에서 인간으로 전파하는 능력을 아직은 획득하지 못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최종 치명률은 약 0.1%. 백신이 없었던 2020년에는 2% 수준이었던 걸 염두에 두면, 치명률 약 30~50%의 H7N9이나 H5N1 바이러스가 인간-인간 감염 능력을 획득해서 팬데믹을 일으키는 일은 상상만으로도 아찔하다. 코로나19 팬데믹 때 소환됐던 1918년 스페인 독감의 정체가 바로 이렇게 조류에서 인간으로 이동한 H1N1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였다.
당연하게도 바이러스 사이에 상호 협약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코로나19 바이러스 대유행이 고작 5년 전이라도 올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대유행이 세계를 덮칠 수도 있다. 걱정스럽게도 지난 팬데믹 이후 반짝했던 감염병 유행에 대한 경각심이 갈수록 옅어지고 있다. 감염병 대응에 필요한 예산이 줄어드는 일이 그 증거다.
그렇다면 평범한 시민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팬데믹을 준비하는 현명한 방법은 무엇일까? 한 가지만 당부하자면 평소 건강을 자신하더라도 해마다 독감 백신을 꼭 맞자. 계절 독감을 일으키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면역이 생길뿐더러 어떤 변종이 나타날지 모르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전체를 상대로도 분명히 효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