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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독서의 문장들우리는 끝에서 시작한다
김혼비 에세이스트 2025년 06월호

크리스 휘타커 『나의 작은 무법자』

2016년 데뷔작부터 2024년 최신작까지, 나올 때마다 각종 주요 미스터리상을 휩쓰는 걸작들을 연달아 쓰는 걸로 명성이 자자해 많은 미스터리 독자들이 애타게 기다렸던 영국 작가 크리스 휘타커의 책이 드디어 한국에 닿았다. 『나의 작은 무법자』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이 책의 원제는 “We begin at the end(우리는 끝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정말로 이 책은 첫 장을 넘기자마자 단 두 페이지로 등장인물 모두를 세계의 ‘끝’으로 무자비하게 밀어 떨어뜨려 놓고 시작한다. 이토록 강렬하고 처절한, 책의 주제 의식과 책의 형식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기까지 하는 하드보일드한 오프닝이라니. 그렇게 그들의 삶은 일찍이 끝나버린 세계에서 겨우 시작된다. 누군가의 인생이 이미 부서져 내린 자리에서,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관계의 잔해 위에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죄가 저질러진 순간에서, 이미 복수의 총탄이 발사된 시점에서.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그 시작 자체가, 그러니까 ‘이제 다 끝났다 싶었는데, 세상에, 아직도 끝이 아님’을 깨닫게 만드는 그 시작 자체가, 그렇게 잔혹할 수가 없었다. 저렇게 끊임없이 몸과 마음이 붕괴를 거듭하는데도 어찌어찌 삶을 계속 이어가는 걸 보고 있으면, 인간이라는 존재란 어쩌면 이렇게 질기게, 야무지게, 정교하게 부서질 수 있는지, 당장이라도 질식할 것 같은 두려움이 속절없이 밀려와서 책의 뒷장을 넘길 용기가 자꾸 꺾일 정도였다. 

이 비극적인 이야기의 중심에는 두 인물이 있다. 먼저, 열세 살의 더치스. 술과 약에 취해 몸도 마음도 망가진 엄마와 어리고 연약한 남동생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무법자’가 되기를 선택했고, 세상에 대한 증오 때문에 벌써 삶에 지쳐 지나치게 조숙해져 버린 소녀. 그리고 더치스의 엄마 스타 래들리의 소꿉친구이자, 스타 래들리의 동생 시시 래들리를 30년 전에 살해한 빈센트와도 소꿉친구인 워크가 있다. 워크는 정의로운 경찰인 동시에 30년 전 사건에서 비롯된 죄책감을 뼛속까지 안고 사는 인물이다. ‘정의’와 ‘속죄’ 사이에서 진자처럼 흔들리는 그의 모습은 인간이 얼마나 오랫동안 과거에 발이 묶여 있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그의 그런 자기 파괴적인 면모는 이 책의 공포의 한 축을 담당한다. 그는 모든 것을 구하려다 결국 아무것도 구하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선량함’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워크는 이 책의 풍경을 가로지르는 그림자 그 자체이며, 더치스가 놓친 부성의 대체물이자 반사체다. 이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정서적 이중창은 불협인데 아름답고 군데군데 무너졌지만 눈부시다. 

소녀는 그 아이의 인생에서, 돌리의 인생에서, 워크의 인생에서 그저 각주에 지나지 않았다. 오래 지속되는 흔적을 남기지 않았고 그 영향도 추하기는 하지만 천만다행히도 짧게 끝날 터였다. 
- p.444 


휘타커는 진부한 감동을 경계한다. 희망이란 말도 조심스럽게, 술에 탄 얼음처럼 아주 천천히 녹여낸다. 그는 “모든 사람은 조금씩 망가져 있다”는 걸 전제로 삼고, 그 망가짐이 흉하지만은 않도록 조명한다. 그래서 이 책은 ‘회복’의 이야기라기보다는 망가짐을 가지런히 하는 이야기에 가깝다. 부서진 것을 다시 조립하려 들기보단, 망가진 조각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진열하는 느낌. 조립식 피규어가 아니라 박물관 유물 수복 작업처럼. 또한 자연의 이미지와 인간의 감정을 병치하는 휘타커의 솜씨는 너무나 탁월해서 바다, 별빛, 정적, 먼지, 부서지는 파도, 이 모든 것이 캐릭터들의 내면을 은유하는 풍경으로 기묘하게 연결된다. 무엇보다 이 책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모든 용서는 불완전하다고. 모든 진실은 결국 누군가의 고통 위에 세워진다고. 그렇기에 “끝에서 시작한다”는 말은 단순한 역설이 아니라 가장 인간적인 진실이 된다. 상처가 끝이 아니라 출발점이 되는. 그렇게 우리는 다시, 시작한다.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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