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의 성장사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도이머이(đ.i m.i)’라는 단어가 있다. ‘새롭게 변모한다’라는 뜻의 이 구호는 베트남이 1986년 시장경제 기반을 열고 2007년 WTO에 가입해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는 개혁과 개방의 여정을 상징한다. 베트남은 연평균 6~7%의 성장률을 기록했고 수출입 규모는 수십 배로 커지며 동남아의 대표적인 제조·수출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농업 중심이던 경제 구조는 제조업·서비스업 중심으로 재편됐고, 삼성·LG 등 글로벌 제조 기업이 대규모 투자를 이어오며 전기·전자 부문이 수출 주력 산업으로 성장했다.
에너지 전환 로드맵 가동되며 전력 사업
설계·조달·시공·운영·투자 수요 급증할 것
이제 베트남은 ‘도이머이싸잉(đ.i m.i Xanh, 녹색전환)’이라는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도시를 가득 메운 7천만여 대의 오토바이 엔진음을 전기 모터의 조용한 회전으로 바꾸고 청정에너지가 공장의 굴뚝과 항만의 하역장까지 스며드는 미래를 그리고 있다. 이 변화는 단순한 환경정책이 아니라 산업·무역·에너지 구조 전반의 전환을 요구하는 흐름이다. 전력·운송·제조·물류를 잇는 전환 로드맵이 동시에 설계돼야 하며 이는 해외 투자자에게도 ‘환경 리스크 관리가 곧 투자 안정성’이라는 메시지를 준다.
국제사회는 2015년 파리협정 이후 기후 목표를 강화해 왔고, 주요 시장은 탄소 규제를 무역장벽과 연결하기 시작했다.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는 탄소집약도가 높은 제품 위주의 수출 구조를 바꾸도록 압박하며, 글로벌 금융기관은 저탄소 전환이 뒷받침되지 않은 신규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를 줄이고 있다.
베트남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경제성장과 탄소감축이라는 두 축을 동시에 달성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파리협정에서 시작된 약속은 지난 10여 년을 거치며 2021년 화석연료 중심에서 재생에너지 중심 산업으로의 전환을 위해 개도국에 자금·기술을 지원하는 공정에너지전환파트너십(JETP) 결성으로 이어졌고, CBAM은 베트남 제8차 국가전력개발계획 개정과 탄소시장 구축을 재촉했다.
베트남의 녹색전환이 열어줄 기회는 크게 세 갈래다. 첫째, JETP에서 개정 제8차 국가전력개발계획까지 이어지는 에너지 전환 로드맵이다. 재생에너지 확대, LNG·원자력 신규 도입, 직접전력구매제도(DPPA) 시행이 맞물리며 전력 프로젝트의 설계·조달·시공·운영·투자 수요가 크게 증가할 것이다. 둘째, 2025년 하반기부터 시범운영한 탄소배출권거래제(ETS)다. EU CBAM 대응과 함께 저탄소 전환 설비·기술 수출과 시장 진입 기회가 열릴 전망이다. 셋째, 국경 너머의 감축 기회다. 각국은 파리협정 제6조에 기반해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 달성을 위한 국제감축사업을 하는데, 이때 확보한 해외감축실적(ITMO)을 국내로 이전해 NDC에 활용할 수 있다. 사업 설계, 배출권 거래, 관련 설비, 기술 수출 등 다층적인 기회가 함께 움직인다.
2022년 12월 베트남은 제45차 EU·아세안 정상회의에서 IPG(G7·덴마크·노르웨이 등 국제 파트너그룹)·GFANZ(글래스고 탄소중립금융연합) 등과 JETP에 가입하기로 합의했다. 이번 협약으로 지원받는 총 155억 달러 규모의 재정 지원 패키지는 IPG로부터의 80억8천만 달러 지원 및 GFANZ 민간 금융으로 구성돼 있다. 목표는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비중을 47%로 확대하고 석탄 발전 용량을 줄이며, 에너지 부문 탄소배출 정점을 기존 2035년에서 2030년으로 앞당기는 것이다.
2023년 8월 베트남 정부는 총리결정문을 통해 JETP 이행계획을 승인했고 같은 해 12월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서는 자원운용계획을 발표해 세부 로드맵과 재원 배분 계획을 공개했다. 최근 미국이 JETP에서 이탈하면서 일부 재원 조달이 불확실해졌지만 독일, 일본 등 주요 파트너국은 참여를 이어가고 있다.
올 4월 확정된 제8차 국가전력개발계획 개정안에는 JETP 선언의 목표를 달성할 구체적인 전력 계획이 담겼다. 2030년 총설비용량 목표를 기존 150GW에서 183~236GW로 상향하고, 태양광 발전 목표를 25GW에서 46~73GW로 확대했다. 풍력 발전도 육상·해상 합산 30~42GW로 크게 늘린다. 2030년까지 LNG 발전소 15개를 준공하며 2031년부터는 4~6.4GW 원자력 발전소를 신규 도입할 계획이다.
신규 직접전력구매제도(DPPA) 시행령과 맞물려 잠시 멈췄던 전력 프로젝트는 제8차 국가전력개발계획 개정으로 재개돼 향후 촉진될 가능성이 크며 이는 우리 기업의 설계·조달·시공·운영·투자 기회를 넓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올 하반기부터 탄소배출권 거래 시작···
향후 거래 플랫폼 등 빠르게 성장할 전망
전력 확충이 공급 부문에서만 확대되는 데 그치지 않으려면 탄소감축 성과를 제도적으로 담보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이것이 베트남 정부가 탄소배출권거래제(ETS) 도입을 준비하는 이유다.
지난 6월 발표된 「온실가스 감축 및 오존층 보호 개정 시행령」은 2025~2028년 ETS 시범운영의 법적 틀을 확정했다. 1차 적용 산업군인 전력·시멘트·철강은 베트남 전체 온실가스 배출량의 약 35%를 차지하며, 이들 산업의 배출량은 탄소집약도 기반 산정 방식으로 무상 할당된다. 올 하반기부터는 제한적인 거래가 시작될 예정이며 제도 안정성과 참여 준비도를 높이기 위해 일정은 일부 조정될 가능성도 있다.
베트남 기후변화국은 ETS를 단순 규제가 아닌 EU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대응의 핵심 수단으로 본다. 2026년 CBAM이 본격 시행되면 베트남산 고탄소 제품의 수출 경쟁력을 지키기 위한 측정·검증·보고 체계 도입과 저탄소 설비 투자가 필수다. 이는 베트남에 생산기지를 둔 우리 기업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며 조기 대응 시 글로벌 경쟁우위로 전환할 기회이기도 하다. 시범운영 이후 탄소시장이 본격적으로열리면 탄소배출권 거래 플랫폼, 인증·검증 서비스, 감축 기술 공급망 등 부수 산업이 빠르게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베트남에서 필요한 탄소배출권 일부는 파리협정 제6조에 기반한 국제감축사업으로 확보할 수 있다. 최근 베트남 정부는 국제감축사업의 정의, 장려 분야, 승인 절차를 구체화하며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장려 분야에는 산업계 에너지 효율화, 친환경 운송 도입, 친환경 발전, 메탄가스 회수 등이 포함된다. 향후 이 분야에서 시범 프로젝트가 추진되면 이를 통해 확보한 해외감축실적(ITMO)은 베트남 NDC 중 국내 감축분에서 상쇄하거나 글로벌 탄소시장 거래에서 활용할 수 있다.
ITMO 거래는 국가 간 합의와 승인 절차가 필요하지만 일단 등록되면 유엔기후변화협약의 국제 등록부를 통해 투명하게 이뤄진다. 이는 단순한 환경 사업이 아니라 감축 실적 확보, 수익 창출, 기술 수출이 결합된 복합 사업 모델이 될 수 있다.
베트남의 녹색전환은 더 이상 선택지가 아니라 필연적 경로다. 에너지 전환, 탄소시장, 국제 감축이라는 세 축이 어떻게 맞물려 돌아가느냐에 따라 베트남의 산업 경쟁력과 무역 지형이 달라질 것이다. 변화의 흐름은 이미 시작됐고 그 속도는 빨라지고 있다.
우리 기업에는 지금이 ‘선점’의 시기다. 특히 재생에너지 설계·조달·시공 및 기자재 공급, ETS 대응용 저탄소 설비 투자, 국제감축사업 컨설팅·운영 분야에서 발 빠른 진입이 향후 10년간의 입지를 좌우할 수 있다.
베트남 정부 또한 해외 기업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기술·자본·운영 경험을 끌어들이고 있으며, 이는 우리 기업이 초기 단계부터 정책 및 시장 형성 과정에 참여할 드문 기회다. 장기적으로는 ‘녹색전환’이 단순한 시장 진입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가치사슬을 함께 설계하는 협력 구조로 이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