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사무직 취업을 위한 ‘스펙’에 영어능력점수가 포함된 지 오래다. 토익(TOEIC)이 대표적이다. 자동차 부품, 화학제품 등 각종 생산물을 대기업에 납품해야 하는 제조기업을 ‘구직자’로 본다면, 이들에게 토익 같은 필수 스펙으로 떠오르는 분야가 있다. 바로 탄소중립(carbon neutrality) 지표다.
최근 글로벌 산업계는 각종 규제를 도입해 산업 공급망 전체에 탄소배출 데이터를 요구하고 있고, 어떤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들 때 탄소를 얼마나 적게 배출하는지를 증명하지 못하면 납품 자체가 어려워지는 추세다. 대표적으로 EU는 탄소세 개념인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도입하고 EU 역외에서 생산된 수입품의 탄소배출량까지 검증해 탄소세를 부과함으로써 역내 기업과의 공정한 경쟁을 유도하고 탄소누출을 방지하려고 한다.
따라서 전 과정 평가(LCA; Life Cycle Assessment), 제품 탄소발자국(PCF; Product Carbon Footprint) 등 제품의 탄소배출 관련 데이터 보고 없이는 글로벌시장 진입 자체가 어려워지고 있다. 이제 탄소배출량 감축은 단순히 환경 친화적이라는 이미지를 쌓는 차원을 넘어 기업의 존폐가 달린 문제다. 그뿐만 아니라 LCA 결과는 친환경 인증·라벨링, ESG 고도화, 정부 공시 의무화 등 탄소경쟁력 확보의 핵심 지표이기도 하다. 따라서 기업활동 중 탄소배출 및 감축량을 어떻게 측정할지가 산업계의 큰 숙제다. 이민 탄소중립연구원 대표는 “글로벌 규제 움직임과 환경 목표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탄소중립과 LCA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강조했다.
자동차 공급망 전 과정 평가연구에서 출발,
글로벌시장의 탄소중립 요구 증대에 사업 기회 포착
2021년 설립된 탄소중립연구원(Carbon Neutral Research Institute)은 제조기업이 탄소 및 온실가스 배출을 쉽게 확인하고 측정해 ESG 보고서 등에 적용할 수 있도록 솔루션을 제공하는 스타트업이다. 마치 국가 연구기관이나 실험실 같은 이름이지만 사업 확장과 투자유치에도 적극적인 사기업이다. 서울 관악구 본사에서 만난 이민 탄소중립연구원 대표는 “AI와 데이터 자동화로 산업현장에 적용할 수 있는 실질적인 탄소감축 솔루션을 만들 것”이라며 포부를 밝혔다.
이민 대표의 연구 출발점이자 지금도 그가 가장 전문성을 갖고 있는 분야는 자동차 공급망이다. ‘탄소’라 하면 화학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 대표를 포함한 창립 멤버들의 전공은 기계공학이다. 이 대표는 서울대 기계공학과 출신으로, 연구실에서 전 과정 평가를 함께 연구한 같은 과 선후배들과 창업에 나섰다. LCA는 생산부터 폐기까지 제품의 생애 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영향을 정량적으로 평가하는 방법론으로, 원재료 채굴, 생산, 운송, 사용, 폐기 등 모든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오염물질의 양, 물 사용량 등을 수치화해 그 환경부하 정보를 평가하는 것이다. 이 대표는 글로벌 자동차 공급망이 복잡한 상황에서 탄소중립이 산업의 사활을 결정지을 수 있는 핵심 이슈로 떠오르자 여기에 사업 기회가 있음을 확신했다고 한다. 연구자로 남지 않고 창업을 하기로 생각을 바꾼 것도 이때다.
그렇게 시작한 탄소중립연구원은 컨설팅을 넘어 데이터 분석 틀을 가지고 기업이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연구를 한다면 LCA 산정의 정확도를 더욱 높이는 일이겠지만 실제 산업현장의 비효율을 줄이며 기업의 애로를 해결하고 싶다. 그렇게 하면 돈을 벌면서도 환경에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학계 흐름이 LCA 산정 정확도에 맞춰져 있다면, 탄소중립연구원은 기업들이 손쉽게 탄소중립 트렌드에 대응할 수 있게 하는 IT 솔루션과 데이터 자동화에 주목한다. 20명 가까운 임직원의 절반을 개발인력으로 두고, LCA 그리고 LCA의 한 범주인 PCF 측정 솔루션을 기업에 제공한다. PCF는 특정 제품이 전 생애주기 동안 단위당 배출하는 온실가스양을 의미하며 각국 규제나 ESG 공시에 핵심 근거로 활용된다.
창업 이후 탄소중립연구원은 여러 정부 부처가 자동차 공급망에 LCA를 적용하는 정책을 수립하는 데 참여했다. 이 같은 정책이 현장에서 자리 잡기 시작한 2023년부터는 본격적인 B2B 비즈니스를 전개했다.
탄소감축과 비즈니스 혁신을 동시에 달성하는 모델을 목표로
제조기업에 IT 솔루션·컨설팅·실무교육 제공
탄소중립연구원은 우리나라 탄소중립 민간 솔루션 부문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가지려 한다. 사업모델은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 등 IT 솔루션, 컨설팅, 실무교육, 크게 세 가지 영역이다. IT 솔루션은 기업들이 기존 전사적 자원 관리(ERP) 시스템에 연동해 별도의 전문인력을 고용할 필요 없이 주요 배출데이터를 손쉽게 산출·보고할 수 있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 대표는 “기업들이 필요한 데이터를 우리 서비스에 업로드하면 몇 번의 클릭으로 LCA 결과가 산출된다”고 설명했다. 컨설팅을 통해서는 기업별 맞춤 정책과 정부·글로벌 규정에 대한 실무적 차원의 대응책 등을 제공하고, 실무교육에서는 직원 역량을 강화하고 현장 적용성을 강화한다.
현재 가장 시급하게 LCA 적용이 요구되는 분야는 제조업, 그중에서도 자동차산업이다. 현대·기아차 등 국내 완성차 업체도 글로벌 규제와 공급망 투명성 강화 흐름에 따라 협력 부품사들에 LCA·PCF 데이터를 요청하고 있다. 이 수요에 빠르게 대응해야만 글로벌 입찰 참여와 비즈니스 유지가 가능하다. 또한 에너지 분야, 특히 지속 가능 항공유(Sustainable Aviation Fuel; 폐식용유, 식물성 기름, 농업 잔재물 등 재생 가능한 원료로 만든 대체 항공 연료) 등 항공산업에도 LCA가 도입되고 있다. 지속 가능 항공유는 기존의 화석연료 기반 항공유에 비해 온실가스 배출량을 크게 줄일 수 있는 대체 연료로 EU 등 해외에서 사용을 의무화하는 추세다. 이 외에도 정유업계, 유통업계 또한 탄소배출 데이터 보고와 관리가 국내외 거래의 기본 요건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 같은 경영 여건 변화에 따라 기업은 거래·협력 지속을 위해 반드시 배출량 데이터를 투명하게 보고하고 탄소감축 노력을 실천해야 한다. 그리고 이 노력에는 시간과 비용이 들기 때문에 이를 얼마나 자동화·효율화할 수 있는지가 경쟁력이 되는 시대다.
지금 탄소중립연구원의 주요 고객은 현대·기아차 등 완성차 업체에 납품하는 다수의 국내 1·2차 협력사들이다. 독일, 일본 등 외국 공급망 데이터 플랫폼과의 연동도 추진하고 있다. 탄소중립연구원은 정책과 기업 현장 그리고 혁신 기술의 교차점에서 효율화·자동화로 산업 경쟁력 제고와 기업 환경 개선을 동시에 달성한다는 계획이다. 이 대표는 “기업들이 가장 싸고, 가장 편하고, 가장 안전하게 LCA 데이터를 보고할 수 있게 지원하고 싶다”면서 미소 지었다. ‘탄소감축’과 ‘비즈니스 혁신’이 동시에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면 글로벌 산업계에 한국형 탄소감축 솔루션 모델을 제시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