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기원전 2세기 때는 중국과 서아시아 세력 간의 경쟁과 충돌이 발생함에 따라 비단, 제지 등 상품과 기술 이전이 이뤄지는 거대 세력의 완충지이자 문명의 교차로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 19세기에는 영국의 인도 보호 전략과 러시아의 남하정책이 만나는 지점이었고, 20세기에는 소련의 자원 공급망 역할을 하며 한동안 서방세계에서 잊힌 곳이었다. 이후 2013년 시작된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의 전략적 요충지이자 러시아의 경제통합 전략인 유라시아경제연합(EAEU)의 핵심 지역이기도 했는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새로운 국제 통상 변화에 따른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다원화 정책과 서방 국가들의 자원시장 다변화 정책이 맞닿으며 글로벌 사우스 국가로서의 가치를 갖게 됐다.
이를 두고 중국과 러시아의 경쟁이 뜨겁다. 중국의 경우 국내 과잉 생산 해소와 에너지·광물 자원 확보, 위안화 국제화를 통한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 견제를 위해 물류 터미널, 철도 인프라 구축 등 주요국을 연결하는 경제 회랑에 중앙아시아를 포함했다. 특히 카자흐스탄은 바다에 접하지 않은 세계 최대의 내륙국으로 인프라 노후 문제를 갖고 있으며 복합운송 및 추가 환적 비용이 발생해 현대화 수요가 많다. 아울러 러시아는 정치적·경제적 앞마당인 중앙아시아에 원전, 열병합 발전소 등 에너지
인프라 구축 및 군사적 지원을 지렛대로 활용해 전방위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문명의 교차로였던 중앙아시아,
최근에는 공급망 안정화 역할 주목
그렇다면 한국에 중앙아시아는 어떤 의미인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에도 한국과는 지정학적 충돌 가능성이 없고 상호 호혜적 협력이 가능한 지역이다. 특히 자원 중심의 경제구조로 대외 충격에 취약하기 때문에 산업 다변화 수요가 높고, 한국과 자동차 분야의 현지화 협력이 확대되고 있다.
우리 정부가 신북방 정책을 계승하고 새로운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중국, 러시아와의 경쟁은 우회하면서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수요와 연계하는 최대한 실용적인 전략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전후 폐허를 딛고 고도 경제성장을 이룬 ‘한국형 성공 모델’의 경험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협력의 고리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
필자가 생각하는 중앙아시아 신북방 지역과의 협력 분야는 첫째로, 글로벌 복합위기 속에서 실크로드를 활용한 공급망 안정화다. 최근 러시아와 중국뿐만 아니라 미국, EU도 중앙아시아와 에너지, 환경 등의 분야에서 다자간 협의체를 활용해 공조를 본격화하고 있다. 장기적 관점에서 풍부한 지하자원이 강점인 공급망 다변화 대상 지역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산업고도화 연계 및 기술협력 분야다. 최근 중앙아시아는 외국인직접투자(FDI)를 유치해 제조업 중심의 산업전환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즉 단순 제조에서 벗어나 유지보수를 시작으로 스마트팜, 스마트시티 등 빠른 시간에 성장이 가능한 사업에 디지털 전환 수요가 높다. 우리는 이를 연계한 공동 연구개발(R&D) 사업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세 번째로, 한류와 연계한 소비재 수출 확대다. 최근 중앙아시아에서는 한국 브랜드 파워가 상승하며 구매 경험률이 높아지고 있다. 또한 중앙아시아는 평균 출산율이 3명에 가깝고 30대 이하 인구가 전체의 절반에 이르는 등 미래 소비 잠재력이 크다. 디지털 친화적이며 트렌드에 민감한 청년층을 중심으로 이커머스 기반 수출 수요가 계속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카자흐스탄 최대 이커머스 기업이자 런던 증시와 미국 나스닥에도 상장한 카스피(Kaspi.kz)의 결제 플랫폼 접속량은 이미 글로벌 IT 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전자상거래 주요 지표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민간보다는 정부 네트워크 기반 활용하고
그룹형 바이어와 다방면 협업 확대해야
그렇다면 우리 기업들이 신북방 협력을 위한 기회의 땅으로 중앙아시아를 활용할 수 있는 전략은 무엇일까. 첫째, 정부 및 공공기관의 파트너십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신북방 지역은 민간보다는 정부 영역에서 현지 네트워크를 구축해 협력 대상의 진정성과 진위를 파악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신북방 정책의 계승과 구현을 위한 정부의 세부 과제들이 나오면 산업별 유관기관의 활동이 이어진다. 예를 들어 양국 산단 간 협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현재 한국산업단지공단에서 운영하는 국가산업단지는 39개이고 6만 개에 가까운 기업들이 입주해 있으며 이들 기업의 수출 규모는 2천억 달러에 달한다. 산단은 동일 업종에 특화된 입주기업들이 밀집한 곳이므로 우리와 중앙아시아의 산단 입주기업 간 협력이 이뤄지도록 연결하며, 한국산업단지공단과 협업을 통해 국내외 수출상담회 등도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둘째, 공급망 연계 기술 사업화 및 기술인력 유치다. 중앙아시아는 중장기적 관점에서 핵심광물 공급망 안정화에 기여할 수 있는 지역이므로 희소금속을 다루는 우리 기업들에는 해외진출 경험을 쌓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관심 있는 소재의 제품화 등 고부가가치화 수요와 연계한 프로젝트를 추진해 볼 수 있다. 다만 기술 분야의 특성상 양산을 위한 R&D 수요가 현지에서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국내 기업에 대한 파이낸싱뿐 아니라 해외 국책은행이나 신용보증기관을 활용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또한 해외실증 사업을 통해 유휴 설비의 이전이나 드론, 자율주행 등 새로운 분야의 규제 샌드박스 실증이 가능하다. 한국의 중저위기술을 이전·수출해 드론 등 분야의 수요와 연계할 수 있다. 중앙아시아에서 제조한 물품을 러시아 등 언어적 동질성이 있는 곳이나 무관세의 제3 지역으로 수출하는 것도 가능하다. 특히 카자흐스탄의 경우 FTA가 발효된 베트남, 이란 등의 국가로 자동차, 식품, 화장품 등 제품을 수출할 수 있다.
또한 해외 전문인력 유치 창구가 될 수 있다. 우수 인재 유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 AI 기업들의 30% 이상이 10인 미만 스타트업이라고 한다. 카자흐스탄은 최근 메타의 오픈소스 AI 모델을 활용해 자체 대규모 언어 모델(LLM)을 개발하는 등 뛰어난 AI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 국가 차원에서 AI 교육인력 양성 계획을 발표했으며 정부조직을 개편해 기존 디지털개발혁신항공우주산업부를 AI디지털개발부로 개편했다. 이 외에도 한국을 좋아하면서 국내의 과학기술대에서 공부하고 있는 중앙아시아 유학생을 신규 채용하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셋째, 다양한 분야에서의 협력이 가능한 그룹형 바이어와의 협업 확대다. 국제사회의 대러시아 수출 규제 이후 독립국가연합(CIS) 지역으로 수출하는 품목이 줄어들면서 수출 편중이 심화된 상태다. 이때 우리가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다수의 계열사를 보유하거나 신사업 추진 수요가 높은 그룹형 바이어와 협업 분야를 확대하는 게 유리하다. 예를 들면 한국 편의점 브랜드 CU와 프랜차이즈 계약을 맺은 카자흐스탄의 신라인그룹(Shin-Line Group)의 경우 유통사업 외에도 한국의 병원 및 식품 생산 기업 유치를 포함한 여러 분야의 클러스터를 구축하며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유망시장인 키르기스스탄과의 협력 확대다. 키르기스스탄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우회 수출 경로로 활용되며 우리의 수출이 대폭 증가하고 있다. 또 키르기스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을 연결하는 철도가 착공되며 물류 인프라 확대 효과가 기대된다. 중소·중견 기업에 물류 지원을 하는 공동물류센터 역시 조만간 개소할 예정이어서 안정적 제품 공급에도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키르기스스탄 최대 기업 중 하나인 도르도이(DORDOI) 그룹이 운영하는 현지 도매시장에는 약 4만 개 사가 입점해 있는데 이들이 최근 수출 보험 지원을 받아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등 인근국으로 진출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