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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독서의 문장들올해의 책과 올해의 영화
김혼비 에세이스트 2025년 12월호


윤가은 『세계의 주인』

이제 곧 연말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은 옷장 한편에 잘 보관해 뒀던 패딩을 몇 달 만에 다시 꺼내 입을 때와 원고 청탁 메일에서 ‘올해의’라는 단어가 보이기 시작할 때다. 올해는 공교롭게도 두 개의 순간이 같은 날에 겹쳤다. 갓 꺼낸 패딩을 입고 출근한 날에 어느 기관으로부터 ‘올해의 에세이’를 한 권 선정해 소개하는 글을 써달라는 메일을 받은 것이다. (어제 마감했고, CJ 하우저가 쓴 『두루미 아내』를 뽑았다. 

맞다. 지금 슬쩍 추천 중이다.) 단 한 개의 ‘올해의’를 뽑는 일은 늘 매우 힘이 들지만(주제가 뭐가 됐든 1위 후보만 백 개 이런 느낌) 무척 재미있기도 해서(머릿속에서 오십 개의 토너먼트가 치열하게 펼쳐지는 느낌) 지난주에 한 잡지사로부터 ‘올해의 술’에 관한 짧은 글을 청탁받았을 때도 흔쾌히 수락했고(캘리포니아산 와인 ‘더 핍’ 피노누아에 대해 쓸 예정이다. 맞다. 역시 슬쩍 추천 중이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12월호 ‘독서의 문장들’에서는 ‘올해의 책’에 대해 써야겠다고 진작부터 마음먹고 있었다. 

하지만 ‘올해의 영화’까지 소개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고 말았다. 올해는 공교롭게도 두 개의 ‘올해의’가 같은 단어에서 겹쳤기 때문이다. 바로 ‘세계의 주인’에서. 그러니까 나에게 ‘올해의 영화’는 윤가은 감독이 연출한 <세계의 주인>이고 ‘올해의 책’은 윤가은 감독이 쓴 『세계의 주인』 각본집이다. 현재 이 영화와 관련해 “아무 정보도 찾아보지 말고 보라”는 ‘노(No) 스포일러 챌린지’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기에(그리고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하기에) 영화의 내용에 대해선 언급하지 못하겠지만…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내내 상영관을 꽉 채웠던 그 압도적인 분위기만은 전하고 싶다. 간간이 들리는 울음 삼키는 소리를 제외하면 사실 장내는 숙연하리만치 조용했는데, 관객 대부분이 마음속으로 열렬히 기립박수를 치고 있다는 게 기운으로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조용함을 뚫고 나오는 그 들끓는 에너지와, 엄청난 일을 함께 겪은 사람들끼리 느끼는 전우애 같은 것이 열기의 형태로 떠돌던 그날의 영화관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마 다들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건 올해의 영화다. 아니 인생의 영화다. 

그리고 얼마 전 아껴두었던 『세계의 주인』 각본집을 읽었는데, 와, 이런 게 각본집을 읽는 매력이구나, 각본집이 존재하는 이유구나, 새삼 깨달았다. 내가 봤던 장면들이 어떤 단어들로 쓰였는지를 살피고, 영화에는 없지만 각본집에는 존재하는 장면들을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건 이토록 재미있고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읽는 사이사이 여러 번 소름이 끼쳤고 여러 번 눈물을 흘렸는데, 마지막 문장에서는 소름이 돋는 동시에 펑펑 울었다. 소설도, 에세이도, 시도 아니고 오직 각본에서만 이 맛을 구현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위대하기까지 한 이 문장만으로도 『세계의 주인』을 읽을 이유가 차고 넘친다. 오늘 이렇게 ‘독서의 문장들’ 마지막 글로 이 책을(아울러 영화도) 소개할 수 있어 너무 다행이다. 

“이 각본을 쓰기 한참 전부터 불현듯 저를 찾아와 자신의 가장 어둡고 가장 빛나는 이야기를 나눠준 수많은 이주인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내가, 네가, 그리고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줘서, 정말 고마워, 이주인.” - p.144 

2019년 1월호를 시작으로 이 지면에 글을 쓴 지 7년이 되었다. 7년이나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저 눈앞에 다가오는 마감들만 그때그때 했을 뿐인데 그 뒤에서 세월이 유유히 흘러갔다. 이제 막 첫 책을 내고 갓 데뷔한 작가에게 덜컥 이렇게 소중한 지면을 내어줬던 『나라경제』에 마음 깊이 감사하다. 그동안 진짜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또 한 해를 살아내느라 우리 모두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다가올 새해를 기다리며 2025년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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