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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정여울의 나란히 한 걸음<케데헌> 열풍 속에서 더 빛나는 우리 궁궐의 아름다움
정여울 『여행의 쓸모』, 『데미안 프로젝트』 저자 2025년 12월호


경복궁, 창경궁, 창덕궁을 거닐다 


“이 세상 어디든 선택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가 주어진다면, 어디서 살고 싶으세요?” 여행기를 오래 쓰다 보면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내성적인 여행자』, 『여행의 쓸모』 같은 여행 에세이를 출간할 때마다 받은 질문도 “어떤 도시, 어떤 나라가 제일 좋은가요?”였다. 눈부신 도시들 중에서 딱 하나만 선택하라니, 너무 가혹한 질문이다. 한없이 로맨틱한 파리의 분위기도, 세상 모든 풍경을 다 모아놓은 종합선물세트 같은 런던의 분위기도, 피렌체의 한없이 고풍스러운 시간 여행도 좋지만, ‘여행하고 싶은 도시’와 ‘살고 싶은 도시’는 다르다. 여행에서는 일상의 울타리를 떠나 새로운 삶의 분위기에 어우러지고 싶지만, 일상에서는 낯섦이나 새로움보다는 편안하고도 익숙한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다. 내가 평생 살고 싶은 도시는 여전히 서울이다. 늘 복잡하고, 인구도 많고, 교통도 막히지만, 나에게는 서울만큼 ‘매일 싱그러운 아름다움’을 선물하는 장소는 없다. 그리고 전혀 모르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잘 알고 있지만, 그 익숙함에서 살짝 벗어나는 뜻밖의 아름다움’을 선물하는 장소가 있다면 바로 서울의 궁궐이다. 



예상치 못한 여행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도시, 서울

서울의 궁궐은 한국의 아름다움을 압축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장소다. 한복을 입고 궁궐에 가면 입장료가 무료라는 혜택이 있다 보니,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각양각색의 한복을 입고 궁궐로 몰려들고 있다. 게다가 <케이팝 데몬 헌터스> 열풍 이후 한복을 차려입고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을 산책하는 외국인 관광객을 더 자주 만나게 된다. 수많은 외국인 틈에서 경복궁을 바라보면 비로소 한국의 궁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가 또렷하게 보이는 듯하다. 마치 전 세계인의 눈으로 한국 궁궐을 더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느낌이다. 멀리 떠나지 않아도 도심 한복판에서 느끼는 시간 여행의 아름다움. 과거에는 왕과 왕족이 살았던 장소지만 지금은 모든 시민을 위해 ‘열려 있는 공간’이라는 점이 더욱 좋다. 경복궁의 수문장 교대식을 바라보고 있으면 수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역사의 한복판으로 순식간에 걸어 들어가는 듯한 낭만적 착시가 느껴진다. 게다가 경복궁의 수문장 교대식은 ‘꽉 짜인 연극’ 같은 느낌이 아니라 신명 나는 마당놀이를 보는 듯한 ‘열린 광장의 느낌’이 있다.

영국 버킹엄 궁전의 근위병 교대식에서는 그런 ‘열린 느낌’을 경험할 수 없었다. 수학적으로 철저히 계산된 듯한 꽉 짜인 느낌이 멋져 보이기는 했지만, 우리 경복궁의 수문장 교대식처럼 열린 공간의 자유로움을 느낄 수는 없었다. 아마도 그들이 지켜야 하는 것이 ‘살아 있는 권력’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국은 아직 군주제의 흔적이 남아 있기에 아무리 상징적인 권력이라 하더라도 왕과 왕비를 비롯한 왕족이 살고 있는 궁을 안전하게 지켜야 한다는 강박을 숨길 수 없는 것이다. 절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서는 안 되는 영국 근위병들의 획일적인 표정에서는 직업인으로서의 긍지가 전해지는 동시에 ‘자유롭게 감정을 표현할 수 없는 안타까움’도 느껴진다. 뾰족한 쇠창살로 만들어진 날카로운 철책을 사이에 두고 근위병 교대식을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보고 싶어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는 관광객들의 모습도 안쓰럽다. 반면 경복궁의 수문장 교대식은 ‘우리 모두 함께 참여하는 시민의 축제’라는 느낌이 훨씬 강하다. 구경하는 시민들도 자유로워 보이고 수문장 ‘연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도 환하기 이를 데 없다. 

한국 궁궐의 생생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야간 개장’에 방문해 보는 것이다. 해마다 창경궁은 독특한 야간 개장 이벤트를 준비하는데, 올해는 ‘물빛연화’라는 테마로 눈부신 궁궐 속 밤 풍경을 연출해 냈다. 입장료가 천 원이라고 해서 순간 귀를 의심했다. 심지어 65세 이상 입장객은 관람료 전체가 무료다. 이렇게 저렴한 가격으로 이렇게 아름다운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 지구상에 몇 군데나 될까 싶었다. 창경궁의 미디어아트 축제인 ‘물빛연화’는 월요일을 제외하고는 예약 없이 매일 자유롭게 참가할 수 있기에 더욱더 제한이 없고 활짝 열린 느낌을 준다. 밤이 되면 조선의 역사를 품은 창경궁이 찬란한 빛의 대향연으로 더욱 아름다워지다니. 뛰어난 미디어아트 감각으로 커다란 감동을 주는 ‘물빛연화’는 창경궁의 ‘춘당지’를 중심으로 총 8곳에서 펼쳐진다.

밤하늘을 따라 고요히 흐르는 궁궐 곳곳의 처마가 이뤄내는 우아한 곡선들. 그 위로 찬란한 불꽃놀이처럼 피어오르는 알록달록한 빛의 형체가 더없이 정겹게 느껴졌다. 미디어아트를 활용해 기술적 화려함을 추구하기보다는 오히려 창경궁 본연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는 연출이라 더욱 마음에 들었다. 춘당지에서 펼쳐지는 공연뿐 아니라 상시로 불빛을 밝히는 연출이 궁궐의 아름다움을 한층 돋보이게 만들었다. 창경궁 건축물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나무와 꽃, 궁궐 구석구석의 크고 작은 길의 아름다움까지 함께 느낄 수 있는 경이로운 체험이었다. 낮에는 당연하다고 여겼던 빛을 밤이 되면 간절히 찾게 되니까. 그 ‘간절한 빛들’이 모여 이뤄낸 빛과 그림자의 오케스트라를 거의 무료로 감상하는 행복에 겨워 오래오래 창경궁 곳곳을 거닐었다.



고궁에서 떠나는 과거로의 시간 여행

한복을 입고 경복궁이나 창경궁, 창덕궁 투어를 하는 사람들에게서 온갖 재미있는 장면들을 많이 보게 된다. 곤룡포를 떼 지어 입고 마치 K팝 댄스를 추는 것 같은 경쾌한 포즈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있고, 더운 날씨에도 화려한 당의는 물론 족두리까지 갖춰 쓰고 선녀처럼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사진을 찍는 외국인도 있다. 서양의 궁중 건축이 ‘왕족인 그들’과 ‘왕족이 아닌 우리들’을 철저히 나눠 왠지 소외감을 느끼게 한다면, 한국의 궁궐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너도나도 왕족의 품격을 즐겁게 연기하며 그야말로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본래 한복이 지닌 품격에 맞지 않는다며 저렴한 촬영용 한복 대여 문화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과 덕수궁의 ‘너른 품’은 이 모든 야단법석을 다 너그러이 받아주는 듯하다. 이제 대한민국은 왕족도 귀족도 없는 평등한 사회이니 이런 무해한 ‘왕 놀이, 왕비 놀이’ 또한 재미있는 시간 여행의 일부로 인정해 줘야 하지 않을까. <케데헌> 열풍으로 점점 늘어나는 한복 투어를 보며 나는 좀 더 아름다운 한복을 더 많은 사람이 입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복 본래의 우아한 멋과 실용성을 잘 살린 한복을 일상에서도 쉽게 입을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우리나라 궁궐이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순간은 바로 눈 오는 날이다. 눈 내리는 창덕궁의 후원, 부용지에서 맞이하는 겨울 풍경은 장엄함과 숭고함으로 가득하다. 날씨가 따뜻할 때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알록달록한 한복을 입고 ‘셀카 놀이’에 여념이 없다면, 한겨울 폭설이 내린 뒤 창덕궁 후원에서 만나는 외국인들은 놀랍도록 조용한 모습으로 ‘한국의 궁궐 건축’ 그 자체를 감상하고 있다. 누구나 놀러 나오기 좋은 계절에 만나는 관광객들은 ‘풍경 속의 나’를 찍느라 바쁘지만, 한겨울의 추위와 폭설까지 뚫고 나온 관광객들은 마치 세상에서 하나뿐인 보물이라도 바라보듯 우리 궁궐에 경이로운 눈길을 보낸다. 궁궐의 건축, 풍경 그 자체에 매혹되는 것이다. 이 순간 궁궐은 더 이상 ‘사진의 배경’이 아니라 ‘사진의 피사체이자 이야기의 주인공’ 그 자체가 된다. 나를 찍고 싶은 열망을 조용히 내려놓고 궁궐의 기와 하나하나에 맺힌 고드름을 관찰하고, 처마와 하늘이 만들어내는 한없이 부드러운 곡선의 미학에 빠져드는 시간. 우리는 비로소 저 멀리 떠나가야만 볼 수 있는 신기하고 낯선 풍경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곳,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이 가장 눈부신 여행의 풍경이 된다는 것을 기쁘게 깨닫는다. 경회루의 연못에 비친 나의 모습을 발견하는 시간, 창덕궁의 부용지가 단단히 얼어붙어 그 연못 자체가 ‘나를 넘어 우리들’ 전체를 비추는 거대한 거울이 되는 시간. 궁궐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찬란한 가교가 되어 우리 앞에 굳건히 서 있다. 



p.s. 그동안 제 여행기와 함께해 주신 모든 독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여행의 쓸모』, 『다시 만난 월든』, 『헤세로 가는 길』 등의 책, 네이버 프리미엄콘텐츠 ‘살롱 드 뮤즈’에서 계속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여행기의 사진을 아름답게 찍어주신 이승원 작가님께도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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