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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시평역동과 전환의 2026년, 출연연의 임무를 다시 묻다
오상록 한국과학기술연구원장 2026년 01월호
병오년(丙午年) 새해를 여는 지금, 대한민국 과학기술계의 심경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하다. 지난해 정부는 오랫동안 논란의 중심에 있던 낡은 연구개발(R&D) 제도를 걷어내고, 녹록지 않은 재정 여건 속에서도 R&D 예산을 과감히 늘리며 과학기술에 힘을 실었다. 그럼에도 중국이 더 이상 추격자가 아닌 경쟁자가 된 현실, 미중 기술패권 경쟁이 빚어낸 글로벌 기술 블록화, 인구 절벽 등 구조적 난제들이 한꺼번에 겹치며, 과학기술계는 여전히 중대한 변곡점에 서 있다. 과거의 성공 방정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퍼펙트 스톰의 한복판에서, 국가 R&D의 심장인 정부출연연구기관(이하 출연연)의 역할에 대해 다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때다. 

지난 1996년 도입된 연구과제 중심 운영제도(PBS)는 당시로서는 필요한 처방이었다. PBS는 경쟁을 통해 연구 효율을 높이고 양적 성장을 이끌며, 대한민국을 과학기술 불모지에서 선진국 추격자(fast follower)의 반열에 올려놓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30년이 흐르는 사이 한때 성장의 사다리였던 이 제도는 ‘혁신의 족쇄’라는 오명을 쓰게 됐다. 연구비 확보를 위한 파편화된 과제 수주 경쟁은 연구자들을 각자도생의 생존 경쟁으로 내몰았고, 국가가 진정 필요로 하는 거대하고 장기적인 임무에 역량이 결집하는 것을 가로막는 구조적 제약이 됐다.

정부가 밝힌 PBS의 단계적 폐지와 기관전략개발단(ISD) 체제로의 전환은 단순한 행정 제도의 개편이 아니다. 이는 협력보다 상호 경쟁에 더 치우쳐온 지난 30년의 R&D 체제를 넘어, 국가 생존과 직결된 명확한 ‘임무’를 완수하는 체제로의 대전환을 선언하는 것이다. 출연연이 나아갈 길은 자명하다. 민간이 감당하기 힘든 고위험·초장기 연구, 국가 난제 해결과 미래 성장동력 창출을 위한 연구에 기관의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2024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선제적으로 도입한 ‘임무중심연구소’ 체제는 이러한 고민의 산물이다. 차세대 반도체, AI·로봇, 기후 기술 등 파급력이 큰 분야에 대해 최고 전문가인 PM에게 의사결정 전권을 위임하고, 실질적인 문제 해결을 정면으로 겨냥하는 이 모델은 출연연 혁신의 시금석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이러한 출연연의 변화를 위한 노력이 구호에 그치지 않고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할 정교한 제도적 설계가 필수다. 즉 새로운 R&D 패러다임에 부응하는 시스템 구축이 병행돼야 한다. 

먼저, 예산 운영의 유연성을 획기적으로 높여야 한다. 불확실성이 높은 선도형 R&D의 특성상 경직된 예산 구조로는 기민한 대응이 불가능하다. 총액으로 예산을 지원하고 세부 운용은 연구 현장의 자율에 맡기는 ‘블록 펀딩(Block Funding)’ 적용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상황 변화에 따라 목표를 과감히 수정하거나 중단하는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평가의 패러다임을 양에서 질로, 결과에서 과정으로 전환해야 한다. 성공이 보장된 안전한 연구에 안주하게 만드는 정량적 지표 대신, 임무 달성의 기여도와 사회적 파급력을 중심으로 한 정성적 평가가 자리 잡도록 해야 한다. 도전적인 목표를 향해 치열하게 연구했다면, 설령 실패하더라도 그 자산과 가치를 인정해 주는 실패 용인 문화가 연구 현장에 뿌리내려야 한다. 마지막으로, 연구자들의 헌신과 도전에 대한 합리적인 보상 체계가 마련돼야 한다. PBS 폐지가 연구자들에게 동기의 상실이 아닌 더 큰 도전의 기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 보상 패러다임을 개별 과제 실적에서 임무 달성 기여도 중심으로 전환해 국가적 임무의 성공이 곧 연구자 개인의 영광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기술이 곧 주권인 시대다. PBS 폐지는 출연연이 ‘생존을 위한 수주 경쟁’이라는 낡은 껍질을 깨고, ‘국가와 인류를 위한 임무’라는 본연의 모습으로 비상하기 위한 중대한 출발점이다. 정부의 전폭적인 신뢰와 지원 그리고 출연연 스스로의 뼈를 깎는 혁신 노력이 맞물릴 때, 비로소 우리는 과학기술 주권 국가로서의 미래를 당당히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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