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에게 아르헨티나는 어떤 나라일까. 대부분 축구, 탱고, 소고기, 그리고 지평선 너머까지 이어지는 팜파스 대평원을 떠올릴 것이다. 실제로 아르헨티나는 오랫동안 ‘세계의 곡물창고’라 불렸고, 한국 식탁에 오르는 콩·옥수수·밀 상당량이 바로 이 나라에서 온다. 20세기 초에는 세계 5위권 경제 대국으로 번영을 누렸으며 유럽 이민자들이 새로운 삶을 찾아 건너오던 ‘기회의 땅’이었다. 그러나 정치적·경제적 혼란이 지속되면서 그 영광은 흐릿해졌고 재정적자, 고인플레이션, 통화 불안정은 오랫동안 해결되지 못한 과제로 남아 있었다.
세계 5위권 경제 대국의 영광 잃은 아르헨티나,
밀레이 정부의 강력한 개혁으로 경제안정 달성 중
이 정체된 분위기 속에서 2023년 말 등장한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은 불필요한 지출을 해체하겠다며 ‘전기톱’을 상징으로 내세운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로 국제 사회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는 기존 정치권의 관행적 정책 방향에서 벗어나 외환·무역 규제를 단계적으로 완화하고 재정지출 억제와 정부 부처 축소 등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그 결과 실제로 여러 지표가 빠르게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취임 당시인 2023년 12월 25%에 달했던 월간 인플레이션은 현재 2% 내외까지 둔화했고, 재정수지도 14년 만에 흑자로 전환됐다. 투자 등의 척도가 되는 JP모건 발표 국가위험도는 약 2,500포인트에서 600포인트 수준까지 낮아졌고, 페소화 가치 역시 일정 수준 안정세를 되찾고 있다. 물론 외환보유고 부족, 취약한 산업 기반, 높은 금리 등 구조적 과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수십 년 만에 경제 기조가 다시 ‘선순환’으로 돌아섰다는 사실만으로도 변화의 의미는 작지 않다. 밀레이 정부는 외화수입 확대를 위해 에너지·광물 분야 투자를 더욱 적극 유치하며 수출 기반을 넓히는 데 정책적 역량을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원래 아르헨티나는 자원 부국의 잠재력을 지닌 나라다. 남미 3위의 경제 규모를 갖추고 있으며 매장량 기준 셰일가스 세계 2위, 셰일오일 4위, 리튬 3위 등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에너지·광물 자원 보유국이다. 그럼에도 한국 기업에는 아르헨티나가 심리적·물리적 거리만큼이나 접근하기 어려운 시장으로 인식돼 왔다. 지금의 아르헨티나는 과거와 확연히 다른 흐름으로 움직이고 있다. 경제정책 개혁과 자원 개발 투자가 속도를 내면서 농업 중심의 경제 구조에서 핵심 광물·에너지 중심 구조로 전환되는 변곡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특히 파타고니아 북부 네우켄(Neuquén) 분지의 바카 무에르타(Vaca Muerta)는 이 대전환의 심장과도 같다. ‘죽은 암소’라는 이름과 달리 이 지역은 아르헨티나경제를 다시 작동시키는 거대한 동력으로 평가된다. 최근 5년간 아르헨티나는 중남미에서 가장 빠른 원유 생산 증가율을 기록했고, 글로벌 에너지 기업들의 투자가 빠르게 유입되면서 에너지 개발 속도를 높이고 있다. 정유·가스 파이프라인, 항만 인프라 확충도 빠르게 진행되면서 LNG·원유 수출국으로 본격 전환할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국영기업 YPF와 이탈리아 에니(Eni)가 추진 중인 총 850억 달러 규모의 LNG 수출 프로젝트는 바카 무에르타의 전략적 가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사업은 약 5만 개의 일자리를 직간접적으로 창출할 것으로 예상되며, 연간 1,200만 톤 규모의 LNG 생산을 목표로 한다. 무엇보다 2030년까지 바카 무에르타 가스 생산량을 두 배로 확대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고, 2031년부터 2050년까지 약 3천억 달러 규모의 LNG 수출을 목표로 하는 아르헨티나 최대 규모의 전략 프로젝트다. ‘세계의 곡물창고’라는 전통적 이미지 위에 대규모 에너지 생산 능력까지 갖추게 되면서 아르헨티나는 글로벌 ‘에너지 탱크’라는 새로운 국가 이미지를 더할 토대를 마련하는 셈이다.
광물산업도 본격적으로 성장 궤도에 올랐다. 2024년 광물 수출액은 46억7천만 달러로 인근국인 페루·칠레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하지만, 이는 동시에 향후 확장 여력이 매우 크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정부는 2024년 대규모 투자 인센티브 제도인 RIGI를 도입했다. RIGI는 리튬을 포함한 대규모 자본집약 프로젝트에 법인세·관세·수출세 감면, 외화 사용·송금 규제 완화 등 파격적인 혜택을 제공한다. 2025년 10월 기준 RIGI에는 총 20개 프로젝트(338억 달러 규모)가 신청했고 그중 8개가 승인됐다. 광업 분야가 전체 신청액의 64.8%를 차지하지만 아직 다수가 승인 대기 중이며, 승인된 투자액만 보면 리튬 프로젝트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RIGI는 앞으로 아르헨티나 리튬 생산 능력 확대, 정제·가공 산업 육성, 북서부 광산지대의 지역경제 활성화를 촉진하는 핵심 정책으로 작용할 것으로 기대되며, 아르헨티나가 글로벌 공급망에서 차지하는 전략적 위상은 지금보다 훨씬 높아질 전망이다.
아르헨티나는 재생에너지 분야에서도 잠재력이 뚜렷하다. 파타고니아의 강한 바람과 북서부 고원의 높은 일사량은 세계 최고 수준의 풍력·태양광 발전 환경을 제공한다. 지난해 10월에는 글로벌 기업 아르셀로미탈이 130MW 규모의 풍력·태양광 하이브리드 프로젝트를 현지에 최초로 가동시키면서 아르헨티나 정부도 재생에너지 비중 확대를 국가 전략으로 내세우고 있다. 기존의 자원 중심 경제 구조에서 신재생 기반 산업까지 확장하려는 시도는 아르헨티나경제를 장기적 안정성과 지속 가능성 측면에서 한 단계 끌어 올릴 가능성이 높다.
풍부한 자원, 재생에너지 기반 등 성장 잠재력 뚜렷하나
경직적 노동시장, 정치 불안정은 리스크
물론 현실적 제약도 적지 않다. 물류 인프라 부족, 높은 운송비, 변동성 높은 외환시장 등 기업 활동에 부담이 되는 요소는 여전히 남아 있다. 노동시장 역시 고질적 문제를 안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2020년 기준 3천 개가 넘는 노조가 존재할 만큼 노조 구조가 복잡하고 경직적이며, 전체 근로자의 43.2%가 비공식 고용 부문에 머무는 이중 구조가 형성돼 있다. 이는 세수 기반 약화로 이어지며 경제 정상화의 발목을 잡아왔다. 다만 최근 정부가 노동시장 유연화와 제도 현대화를 위한 노동법 개정을 추진하는 등 제도 개선 신호도 감지되고 있다.
정치적 환경 역시 안정적이지만은 않다. 지난해 9월 초 부에노스아이레스주 선거에서 여당이 크게 패배하며 개혁 동력이 약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됐으나, 뒤이은 10월 26일 총선에서는 여당이 의회 의석을 확보하며 일정 부분 정치적 기반을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미국 재무부도 아르헨티나 중앙은행과 약 200억 달러 규모의 외환시장 안정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IMF·세계은행·미주개발은행(IDB) 등 주요 국제기구가 개혁정책에 대한 지원 의사를 밝히는 등 외부 지원이 정부의 개혁 추진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럼에도 상원에서 야당이 과반을 유지하고 있어 노동·조세·연금 개혁과 같은 핵심 법안의 처리는 여전히 정치적 협상력에 달려 있다. 외자 의존 심화, 경기 둔화 압력 등 구조적 리스크를 고려하면 향후 아르헨티나 진출은 기회와 위험을 균형 있게 관리하는 전략적 접근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이 있다. 아르헨티나는 더 이상 과거의 정체된 나라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랜 기간 억눌렸던 잠재력이 구조 개편과 함께 하나둘 깨어나고 있고 글로벌 투자자들도 그 가능성에 다시 주목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한국과도 특별한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1980년대 약 4만 명에 가까운 교민이 정착했던 국가이며, 2025년은 한·아르헨티나 이민 60주년을 맞은 뜻깊은 해이기도 했다. 이러한 인적 기반과 축적된 신뢰는 향후 공급망·자원·에너지 협력을 한 단계 확대할 수 있는 중요한 자산으로 작용할 것이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 가속화되는 지금, 전략적 관점에서 아르헨티나를 핵심 파트너로 평가해야 하는 이유다.
정치·경제 체제가 재정비되는 변화의 흐름 속에서 아르헨티나는 농업 중심 국가에서 복합 자원 국가로의 대전환을 맞고 있다. 제도 개편의 지속성, 산업 기반 강화, 사회적 수용성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오랜 침체를 뚫고 구조적 변화가 본격화되고 있다는 사실은 아르헨티나가 새로운 단계로 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번 변화가 일시적 반등에 그칠지, 지속 가능한 도약으로 이어질지는 앞으로의 선택과 축적되는 신뢰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