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폴란드 정부와의 대규모 방산 계약 체결 소식이 잇따라 보도되면서 한국의 경제협력 파트너로서 폴란드의 존재감이 한층 더 커지고 있다. 다수의 K방산 기업이 폴란드에 생산 거점을 구축하고 있으며, 이에 발맞춰 국내 주요 은행들도 현지 법인을 설립해 폴란드 진출 기업을 대상으로 금융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방산협력을 촉매로 한·폴란드 경제협력이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는 모습이다.
K방산 수출에 이목이 쏠려 있는 동안, KDI는 폴란드와 장기적인 경제협력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새로운 양자협력 의제를 발굴하고 있었다. 폴란드와 한국은 제조업 비중이 높은 산업구조를 공유하며, 지정학적으로 폴란드는 동유럽과 서유럽 시장을 연결하는 공급망 허브라는 이점을 가진다. 이러한 요인들을 종합할 때 전기차 배터리를 비롯한 첨단 제조업뿐 아니라 서비스산업 전반에서도 양국 간 협력을 확대할 잠재력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무엇보다 산업 경쟁력이 기업의 디지털 역량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을 고려해 중소기업 디지털 전환을 전략적 협력 의제로 설정했고 이를 토대로 폴란드 정부와의 경제발전경험 공유사업(KSP)을 기획했다.
중소기업이 경제 핵심 동력이나 디지털 전환이 과제…
AX·DX 집중, 중기 맞춤형 지원, 규제 샌드박스 등 제안
중소기업은 폴란드 전체 기업의 99.8%를 차지하고 GDP의 46.6%를 창출하는 국가 경제의 핵심 동력이지만 디지털 전환과 AI 도입 과정에서 여러 제약에 직면해 있다. 대표적으로 디지털 기술 도입 필요성에 대한 낮은 인식, 공공-민간 연계 부족에 따른 정책 시너지 저하, 중소기업 디지털 전환 수준 평가를 위한 체계적인 모니터링·평가 시스템 부재 등이 주요 과제로 지적됐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로는 사이버공격이 급증하면서 중소기업 차원의 사이버보안 역량 강화 필요성도 점점 높아지는 추세다.
이러한 배경에서 폴란드 경제개발기술부(Ministry of Economic Development and Technology)는 한국의 디지털 전환 정책과 지원 프로그램을 사례로 중소기업 디지털 전환을 위한 국가전략을 마련하고자 KSP 사업을 신청했다. 이번 폴란드 KSP 사업은 ‘폴란드 중소기업 디지털 전환을 위한 전략적 프레임워크 구축’을 주제로, 중소기업 디지털 전환 중장기 정책 수립, AI 분야 혁신 생태계 구축 및 규제혁신, 사이버보안 분야 혁신 생태계 구축 및 규제혁신 등 총 세 가지 세부주제에 따라 심층연구를 진행했다.
이번 폴란드 KSP 사업은 시의성 있게 실질적인 정책제언을 제공할 수 있었다. 마침 폴란드 경제개발기술부는 중소기업 디지털 전환을 위한 중장기 국가전략을 구상하고 있었고, 한국 정책사례가 주는 시사점을 반영해 2026년 해당 정책을 발표할 계획이었다. 폴란드 정부 관계자는 한국에서 중소벤처기업부를 중심으로 중소기업 디지털 전환을 위한 다양한 전략과 지원 프로그램이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점을 인상 깊게 봤다. 이에 KSP를 통해 중소기업의 디지털 기술 도입 수요를 이끌고 정부, 대기업, 연구기관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협력해 디지털 전환 혁신 생태계를 구축한 한국의 제도적 메커니즘을 파악하기를 희망했다.
한국 연구진은 중소벤처기업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운영하는 스마트 제조혁신 지원사업, 스마트서비스 지원사업, AI바우처 지원사업 등을 소개하며 AX·DX 분야에 자금 지원을 집중해 중소기업의 기술혁신을 촉진할 것을 제안했다. 특히 디지털 전환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려면 정부가 수혜자인 중소기업뿐 아니라 디지털·AI 기술 및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급기업(Technology Provider)을 주도적으로 선정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하면서 중소기업의 실제 수요를 반영해 맞춤형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 중소기업이 새로운 디지털 기술을 효과적으로 개발하고 실증하도록 지원하는 디지털·AI 규제 샌드박스 도입, 중소기업의 사이버보안 접근성 강화를 위한 지역별 사이버보안센터 설립, 간소화된 사이버보안 인증체계 운영 등을 주요 정책제언으로 제시했다.
폴란드, 네이버·안랩과 면담하며 협력 타진…
AI 팩토리 KSP 신청 등 후속 협력으로도 연결
더욱이 이번 폴란드 KSP는 디지털 전환 분야에서 양국 정부와 기업 간 구체적인 협력 방안을 모색하며 실질적인 경제협력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중간보고회 방한 일정에서 폴란드 정부 관계자는 네이버, 안랩 등 한국을 대표하는 AI, 사이버보안 기업과 면담하며 폴란드 기업과의 협력 가능성을 검토했고 실질적인 후속 협의로 이어졌다. 일례로 한국의 리커머스(중고 거래) 스타트업인 번개장터가 KSP 최종보고회에 초청받아 AI 기반 안전결제시스템 도입사례를 소개했고, 동유럽 최대 이커머스 기업인 알레그로, 폴란드 디지털경제상공회의소(e-Izba)와의 별도 면담을 통해 폴란드 시장 진출을 위한 실무협의까지 진행하는 성과를 거뒀다.
폴란드 KSP 사업이 정책자문 외에도 다양한 연계 성과를 창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KDI의 사전 연구와 선제적인 사업 발굴 전략이 있었다. KDI는 동유럽시장의 핵심 허브로 부상하는 폴란드의 전략적 중요성을 고려해 폴란드 정부와 신규 KSP 사업을 발굴하고 기존의 방산 중심 경제협력 범위를 AI, 사이버보안을 포함한 산업의 디지털 전환 전반으로 확대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사업 착수 1년 전인 2023년부터 ‘국제협력과 지식공유’라는 연구과제를 기획해 폴란드 중소기업 디지털 전환 정책 현황과 한국 사례를 분석했다. 이후 해당 연구 결과를 폴란드 경제개발기술부에 공유하며 KSP 기반 양자협력을 제안했고, 성공적으로 폴란드 측의 사업신청서 접수를 이끌어냈다.
또한 국내와 현지 관계기관 네트워크를 최대한 활용한 사업관리 방식은 KSP 결과를 후속 협력 활동으로 연계하는 데 기여했다. 최종보고회 준비 과정에서 코트라 바르샤바무역관의 협조로 폴란드에 진출한 한국 기업 관계자 30여 명을 보고회에 공식 초청해 한·폴란드 기업 간 네트워킹의 장을 마련했다. 또한 폴란드 측에서는 최종보고회 이후 슈퍼컴퓨터와 반도체 분야에서 한국과 협력을 희망하는 현지 기업, 연구소와의 면담을 주선하기도 했다. 이렇게 축적된 네트워크는 이후 폴란드 고위급 방한행사 기획, 관계기관 간 후속 협력 논의 등에도 요긴하게 활용되고 있다.
이번 폴란드 KSP 사업은 종료됐지만 디지털 전환, 특히 AI 분야에서의 후속 협력은 더욱 활발하게 진행될 전망이다. 먼저, KDI와 폴란드 경제개발기술부는 2026년 상반기에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AI 세미나를 공동 개최해 AI 규제 샌드박스의 제도적 설계 방향과 운영 사례를 공유하고 AI 규제혁신 분야에서 양국 협력 가능성을 모색할 예정이다. 해당 세미나를 계기로 폴란드 측에서는 KSP 핵심 정책제언 중 하나인 AI 규제 샌드박스 설치를 위한 구체적인 정책 운용 방안을 정교하게 다듬을 것으로 보인다.
또 폴란드 국가 디지털 전략의 총괄부처인 디지털부(Ministry of Digital Affairs)에서 AI 규제 샌드박스, AI 팩토리 관련 주제로 후속 KSP 사업을 신청했다. 최근 EU에서 폴란드 포즈난, 크라쿠프 지역 신규 AI 팩토리 설립 계획을 발표하며 폴란드가 유럽 AI 혁신의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다. 따라서 디지털부와의 후속 사업 확정 시 현 정부의 AI 이니셔티브와 연계해 AI 협력을 극대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폴란드 KSP는 KDI의 연구 역량을 활용해 디지털 전환, AI 도입, 사이버보안을 아우르는 새로운 협력의제를 도출하고, 정부 간 정책대화와 후속 협력으로 발전하도록 뒷받침한다는 점에서 싱크탱크 역할에 걸맞은 사업이었다. 이번 협력을 바탕으로 향후 양국이 디지털 전환과 AI 분야에서 장기 협력의 토대를 구축하고, KSP가 실질적 경제협력의 마중물 역할을 이어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