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내용으로 건더뛰기

KDI 경제교육·정보센터

ENG
  • 경제배움
  • Economic

    Information

    and Education

    Center

칼럼
밥 한 그릇의 위로시장의 맛
박찬일 음식 칼럼니스트 2026년 02월호


내가 맛을 배운 곳은 시장이었다. 현재도 진행형이다. 한국에 시장이 생긴 것은 아주 오래 전인데, 대략 근대적인 모습을 갖춘 것은 구한말이다. 독특하게도 과거의 시장이 현대에도 대부분 살아남아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서울 남대문시장이 그 예다. 건물은 바뀌었어도 장소의 연속성, 역사성은 면면히 그대로다. 조선시대에 이미 중요한 시장의 역할을 하다가 현대로 이어진 남대문시장은 전국에서 도성으로 몰려온 물자가 보관되고 풀리는 장소였고 이내 민간시장의 몫도 하게 된다.

시장은 사람이 몰리고 돈이 넘치니 음식도 명물일 수밖에 없었다. 상설시장도 있었지만 예전엔 오일장, 7일장 같은 정기적인 장이 많았다. 하나의 가설이 있는데, 시장에 솥을 걸고 국을 팔았던 것이 바로 현대의 설렁탕, 국밥이라는 것이다. 

서울의 노포는 국밥집이 많은데 이런 역사와 관련이 깊다. 한 예로 8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해장국 명가 청진옥은 과거 종로의 나무장(시전)부터 시작된다. 천막을 치고 나무꾼들과 장 보러 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솥에 국을 끓였던 것이다. 나주의 국밥으로 널리 알려진 백 년 노포 하얀집의 역사도 대략 그렇게 짐작하고 있다. 나주에는 지금도 호남 최대의 도축장이 있는데, 우시장이 워낙 크고 유명해서 사람들이 많이 몰렸다. 솥을 걸어 소고기국밥을 만들었고 그것이 나주곰탕의 역사로 이어진다. 

흥미로운 건 젊은 세대도 순댓국(돼지국밥)을 아주 좋아한다는 점이다. 외국 음식 등 먹을 것도 많은 시대에 굳이 순댓국을 찾을 것 같지 않은데 의외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순댓국은 엄청 전국적인 음식인데도 특이하게 역사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시장에 산재한 순댓국집이 역사를 써오고 있다. 당장 기억나는 집만 해도 전주 남부시장, 제주 동문시장, 청주 육거리시장 등 전통시장마다 있는 순댓국 명가다. 내가 자란 서울도 마찬가지다. 어려서 동네 재래시장에 가면 언제든지 순대를 먹을 수 있었다. 등받이 없는 나무 의자가 빙 둘러 있는 좌판에서 불을 피우고 순댓국을 끓여 파느라 주인 아줌마들의 고생이 심했다. 손님도 고역이었다. 연탄 화덕을 많이 쓴 탓에 그 연기를 마셔가며 순댓국을 퍼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접시 순대도 마찬가지다. 고춧가루 섞인 소금에 순대와 간을 찍어 먹던 것이 아마도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을 것이다. 그때 이미 나는 순대의 맛을 알았다. 떡볶이, 어묵도 좋았지만 순대는 더 기름지고 진했다. 기름기 없는 시대에 순대가 그나마 고기 몫을 해주던 참 서글프고 힘든 시절이었다. 순대가 반짝반짝 기름기를 뽐내며 똬리를 지은 채 좌판에 놓여 있던 광경은 아마도 고단한 시대의 어떤 스냅사진 같은 장면으로 많은 사람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을까. 

시장의 음식으로 순댓국보다 더 흔한 건 사실 칼국수였다. 밀가루가 많이 수입돼 언제든 값싸게 한 끼 할 수 있는 게 바로 칼국수였으니까. 칼과 도마, 화덕 하나만 있으면 앞치마 두르고 장사를 했다. 칼국수가 널리 퍼진 중요한 토대가 있었으니, 밀가루 말고도 연탄과 멸치였다. 연탄은 가스불처럼 바로 열을 낼 수는 없지만 장사할 시간에 맞춰 최대 화력을 유지하는 방법이 있었다. 그것도 형편이 안 되는 장사꾼들을 위해 시장 한 편에는 꼭 연탄불 장수가 있었다. 적당한 불땀의 연탄을 미리 피워 웃돈을 얹어 파는 장하였다. 대개 리어카 장수들이 그런 가게를 애용했다. 그 리어카가 시내 곳곳에 퍼져 포장마차도 하고, 떡볶이도 팔고 순대도 팔았다. 

아, 멸치 얘기도 한 토막. 근대적인 멸치잡이는 일제강점기에 성행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는 거의 전역에서 멸치가 났는데, 남해안과 동해안 어장이 컸다. 멸치를 삶아 건조하면 유통하기가 좋았다. 생선을 구경하기 힘든 산골 마을까지 가는 해물이 몇 가지 있었는데, 북어와 함께 멸치가 인기였다. 감칠맛을 내는 최고의 재료였기 때문이다. 칼국수의 번성도 그 덕이었다. 멸치 한 줌으로 국물을 내고 반죽한 국수를 넣어 먹었다. 우리 음식사는 시장에 뿌리를 내리고 시장에서 컸다. 시간이 된다면 가까운 시장에서 국밥 한 그릇 할 일이다. 
 
보기 과월호 보기
나라경제 인기 콘텐츠 많이 본 자료
확대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