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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로드리고의 여행 한 페이지라다크를 앓다
박 로드리고 세희 촬영감독 2026년 02월호


바람결에 들려온 얘기였다. 북쪽으로 올라가면 은둔의 왕국이 나온다고. 지상 최후의 낙원인 그곳은 일 년에 서너 달만 길이 열리는데, 이제 막 차가 다니기 시작했다고. 호기심 많은 여행자를 미혹시키기에 차고 넘치는 풍문이었다. 인도 북부를 여행 중이던 나는 여정을 바꿔 더 깊은 북쪽으로 향하기로 했다. 인도와 중국, 파키스탄이 국경을 맞댄 ‘라다크(Ladakh)’로. 

히말라야 산맥에 면한 고지대라 겨울이 긴 곳이었다. 눈이 녹아 고갯길이 열리긴 했으나 아직 위험해서인지 대중교통이 재개되진 않았고 생필품을 가득 실은 트럭만이 긴 행렬을 이루며 다녔다. 나는 다른 여행자 둘과 함께 트럭을 얻어 타고 가만히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히는 고지대의 험준한 고갯길을 넘었다. 라다크에 가기 위해서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도로인 ‘타그랑 라(Taglang La)’를 넘어야 했다. 무려 해발 5,328m에 난 도로였다. 




개발되지 않은 지구의 원형과도 같은 곳…
경쟁의식 없이 돈보다 좋은 관계를 중시하는 사람들

출발한 지 이틀이 지나 타그랑 라를 넘었을 때였다. 세상에나. 고개 너머에는 여태 본 적 없는 기묘한 풍광이 펼쳐져 있었다. ‘이국적’이라는 말로는 다 채워지지 않을, 마치 다른 행성에 도착한 것 같은.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땅은 황량했고 산은 죄다 벌거숭이에다 이름 붙일 만한 식물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햇살은 뜨거웠고 대기는 한없이 투명해 하늘은 비현실적으로 파랬다. 소문대로 오염되지 않은, 개발되지 않은 지구의 원형이 거기에 있었다. 험준한 산맥에 둘러싸인 탓에 라다크는 고립무원마냥 외부 문명이 쉽게 드나들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유한 사유체계 속에서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었다. 

전통적 생활방식을 유지하고 있는 라다크 사람들은 스트레스가 적은 편이고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산다. 생활이 진행되는 속도 역시 여유롭고 편안하다. 그들은 맑은 공기를 마시고 규칙적이고 충분한 운동을 하며 정제되지 않은 천연식품을 먹고 산다. 그들의 몸은 자신들이 속해 있는 자연세계를 거스르는 음식물에 익숙하지 않다.

『오래된 미래』의 한 대목이다. 라다크를 추억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라다크 내부 사람이 아니라 북유럽의 언어학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다. 그녀는 언어학 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라다크를 오가다 라다크의 문화와 철학에 매료돼 『오래된 미래』를 썼다. 출판사 소개를 빌리자면 『오래된 미래』는 1992년 발간 이후 세계 50개 언어로 번역돼 전 세계 독자들에게 널리 읽히는 책이 됐다. 

물질문명과 과학문명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서양의 관점으로는 라다크 사람들을 단박에 이해하기 힘들다. 낙후된 사회에서 고된 육체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그들은 가난이 드리운 그늘에서 시름겹고 응당 불행해야 하는데, 웬걸 유토피아를 살아가는 사람들마냥 행복해 보이니까. 라다크 사람들은 시간에 쫓기지 않고 마치 놀이하듯 느긋하게 노동하고, 아이들은 다른 아이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경쟁의식 없이 자라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마을의 대소사를 공동으로 실행하며, 돈을 버는 것보다 이웃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간다. 그런 모습을 보고 문화적 충격을 받은 저자가 라다크에 16년을 머물며 천천히 이해해 가는 과정을 담았다. 그리고 그 이해 끝에 질문한다. 서양 사회가 ‘미래’로 향하는 방향이 과연 옳은가? 라다크의 ‘오래된’ 생활방식과 사유체계야말로 우리 세계를 건강하게 이끌어갈 희망 아닐까?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세계가 너무 한쪽으로 치닫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도록 그 방향을 전환해야 하는 것이다. 도시와 지방, 남성과 여성 그리고 문화와 자연 사이의 균형을 복원해야 한다. 라다크의 사례처럼 우리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해 주는 상호연계의 의미를 이해함으로써 향후 나아갈 방향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라다크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런 폭넓은 시각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치유할 방법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라다크에서 돌아와 여행의 감흥이 채 가시기 전에 『오래된 미래』를 읽었다. 라다크를 떠나며 여행이 완료된 것이 아니라 한국에 돌아와 책상 위에서 여행의 마침표를 찍게 된 것이다. 덕분에 나의 라다크 여행은 더욱 풍성해졌다. 『오래된 미래』를 알지 못해 끝내 읽지 않았다면 여행의 부피도 반쪽이 됐을 것만 같다. 

라다크에서 제일 심한 욕 ‘숀 찬’은 
‘화 잘 내는 사람’이라는 뜻

나는 편력이 무척 심하다. 그 성향이 독서에도 적용돼 깊이 있게 여러 번 읽기보다는 다양하게 많이 읽는 것을 좋아한다. 책 읽고 여행하는 것 말고는 따로 인생을 즐기는 방법도 모르고 살았는데, 어느 날 문득 집을 둘러보니 온 사방이 책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집이 원체 좁기도 했지만 이렇게는 살 수 없겠다 싶어 큰맘 먹고 다 내다 팔고 버렸다. 당장은 계획에 없지만 나중에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 몇십 권만 남겨놓고. 『오래된 미래』는 애써 남겨둔 책 가운데 하나다. 다시 읽으면서 보니 젊어서 그어둔 밑줄이 가득하다. 밑줄에는 당시의 패기와 치기도 은근하게 녹아 있어 새삼스럽다. 그때는 당당했을지 몰라도 지금 읽으니 가슴 뜨끔하고 창피한 대목이 있는데, 그래도 용기를 내 옮겨본다. 

라다크에서 화를 내는 사람은 그 어떤 사람보다 큰 질타를 받는다. 이곳에서 가장 심한 욕설은 ‘숀 찬’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화 잘 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라다크에서는 공격적인 행동이란 지극히 드물었다. 그런 것은 너무나 예외적인 것이어서 사람들은 과연 그런 게 존재하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할 정도였다. 








화내지 않고 느긋한 사람이 되자고 다짐하며 오랫동안 노력해 왔다. 아마도 라다크 등지를 여행하며, 『오래된 미래』 등의 책을 읽고 느낀 것들이 자연스럽게 쌓여 형성된 가치관인 것 같다. 어지간히 노력해도 그런 사람이 되기란 어려울 텐데, 최근의 나를 돌이켜보면 그러려는 노력조차 게을리했다. 오랜 다짐이 무색하게 촬영장에서 어린 스태프들에게 쉽게 상처 주는 무심한 어른이 된 것만 같다. 늘 분주하고 다그치고 화내는 그런 사람 말이다. 라다크를 반추하지 않았다면, 『오래된 미래』를 다시 읽지 않았다면 돌아보지 못했을 부끄러운 모습이다. 내일만 해도 당장 드라마 촬영장에 가야 하는데, 다시 한번 굳게 다짐한다. 여러 사람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거대 산업의 현장이니 느긋함은 차치하더라도 화는 내지 말자고. 

책 읽기처럼 여행도 한 번 갔던 곳은 좀처럼 다시 가지 않는다. 새로운 곳, 가보지 못한 곳을 여행하고픈 열망이 너무 커서 그렇다. 라다크 또한 한 번 가본 것이 전부인데 조금은 예외적으로 여행 당시에 10년 후쯤 다시 와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다 그렇지만 라다크의 아이들은 유독 해맑아서 여행하며 찍은 아이들 사진을 들고 다시 찾아가고 싶었다. 한국에서의 10년은 너무 많은 것을 바꿔놓는 시간인데, 수백 년 전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라다크에서는 10년이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했다. 

책을 다시 읽었더니 라다크를 또 여행하고 싶은 마음이 사무친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오래된 미래』에서 라다크에 불기 시작하는 개발 열풍을 우려한다. 나는 라다크를 여행하며 조금도 흠결을 찾을 수 없었는데, 그때가 이미 서양 문화의 유입으로 라다크의 가치관이 퇴색된 상태였다니 더욱 놀랍다. 저자의 라다크인 친구가 들려줬다는 얘기가 뇌리에 깊이 남는다.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제 여동생이 레(Leh)에 살거든요. 여동생은 일을 빨리하게 만드는 것들은 뭐든지 가지고 있어요. 옷을 가게에서 구하고 지프를 타고 다니고 전화기나 가스 요리기도 가지고 있어요. 그런 것들 때문에 시간이 많이 절약될 텐데 제가 찾아갈 때면 저하고 이야기 나눌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바쁘답니다.”

씁쓸한 일이지만 여행자가 많이 찾을수록 라다크의 파괴는 가속될 것이라 다시 가고 싶은 마음과 저어되는 마음이 팽팽하게 맞선다. 글을 쓰다 말고 몇 번이나 샛길로 새서 라다크에 갈까 말까 여행 계획을 세웠다 접었다 혼자서 난리다. 『오래된 미래』를 읽고, 이 글을 구상하고 쓰는 동안 ‘라다크 앓이’가 심했는데 탈고하고서도 한참을 더 앓아야만 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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