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호에서 필자는 AI가 화면 밖 현실 세계로 걸어 나오는 ‘피지컬 AI’를 이야기했다. 그로부터 넉 달 뒤 그 흐름은 한 기업의 전략을 넘어 국가의 성장 전략이 됐다. 지난 6월 29일 청와대 영빈관, 이재명 대통령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양옆에 두고 ‘3대 메가프로젝트’를 발표한 것이다. 두 그룹이 국내에 쏟아붓겠다고 밝힌 금액은 합쳐서 4,755조 원. 삼성이 2,655조 원, SK가 2,100조 원을 투자하며, 여기에 GS·네이버 등의 투자를 더해 전체 규모가 약 5천조 원에 이른다고 한다. 자릿수부터 낯선 이 숫자 안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
한 해 정부 예산의 6배 넘는 초대형 AI 프로젝트의 등장
4,755조 원은 올해 정부 예산 약 728조 원의 6배가 넘고 연간 국내총생산(GDP)의 약 두 배에 해당하는, 국내 기업 역사상 초유의 액수다. 미국이 추진 중인 초대형 AI 인프라 사업 ‘스타게이트’와 비교해도 여섯 배가 넘는 규모다. 일부 언론들은 이 투자가 이론상 700만 명에 이르는 고용유발효과를 낼 수 있다고 추산했다.
이 투자가 향하는 곳이 바로 3대 메가프로젝트인 반도체와 피지컬 AI, 그리고 AI 데이터센터다. 이 대통령은 이 세 가지를 두고 “초격차 대한민국 대도약을 위한 삼각축”이라고 표현했다. 화면 안에서 답하던 생성형 AI가 공장과 물류, 자동차 같은 현실 공간으로 뻗어 나가려면 그 바탕에 반도체라는 두뇌와 데이터센터라는 심장이 필요하다는 구상이다. 이 대통령은 발표가 끝난 뒤 두 회장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며 “국가 영웅, 국민 영웅으로 불러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주목할 점은 이 거대한 베팅의 방향이다. 그동안 글로벌 AI 경쟁의 주인공은 오픈AI, 구글 같은 소프트웨어 기업이었다. 얼마나 똑똑한 챗봇을 만드느냐가 승부처였다. 그런데 한국이 국운을 건 곳은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반도체·로봇·데이터센터라는 하드웨어와 인프라다.
이유가 있다. AI가 현실로 나올수록 승부의 영역이 ‘똑똑한 모델’에서 그 모델을 돌릴 ‘물리적 기반’으로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뛰어난 AI라도 이를 학습시키고 구동할 반도체, 그 반도체를 모아둘 데이터센터, 그리고 그 지능을 현실에서 실행할 로봇이 없으면 작동하지 않는다. 정부가 이 셋을 하나로 묶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피지컬 AI가 현장에서 모은 데이터를 데이터센터로 보내 다시 산업 혁신을 이끄는 ‘선순환’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로봇산업의 승부는 하드웨어가 아닌 데이터에서 결정된다”는 시각이 이번엔 국가 차원의 인프라 전략으로 확장된 셈이다.
이번 프로젝트의 또 다른 특징은 투자가 수도권을 넘어 지방으로 향한다는 점이다. 청와대에 따르면 수도권을 제외한 서남·충청·영남권의 투자 규모만 약 1,600조 원에 달한다.
가장 큰 몫은 서남권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총 800조 원가량을 투자해 메모리반도체 공장(팹) 4기를 새로 짓는다. 그동안 한국의 반도체 생산은 경기 평택·용인과 충청권에 집중돼 있었기에, 서남에 대규모 반도체 단지가 들어서는 것은 사실상 처음이다. 이재용 회장은 후보지로 광주광역시를 직접 언급했다.
SK그룹은 반도체 생산 인프라 투자에 더해 전국 각지에 AI 데이터센터를 구축하는 데만 1천조 원을 배정했다. 우선 5기가와트(GW) 규모의 데이터센터를 0.5~1GW 단위로 나눠 구축하고, 이후 규모를 순차적으로 확대해 ‘AI를 소비하는 나라’에서 ‘지능을 수출하는 나라’로 바꾸겠다는 구상이다.
환호 뒤에 남은 냉정한 질문 세 가지
역대급 청사진에 시장과 지역은 들썩였지만, 전문가들은 몇 가지 냉정한 물음도 함께 던진다.
첫째는 전력 확보다. 반도체 공장과 AI 데이터센터는 24시간 돌아가는 대표적인 전력 다소비 시설이다. 정부 추산으로도 서남권 반도체 클러스터에 6.3GW, AI 데이터센터에 18.4GW의 전력이 추가로 필요하다. 이는 현재 국내에서 가동 중인 원전 20기 안팎에 맞먹는 발전용량이다. 게다가 전력이 충분히 생산된다 하더라도 수요처까지 보낼 송전망이 제때 깔리지 않으면 ‘병목’이 생긴다. 전문가들은 기존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송전망을 확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둘째는 공급과잉 우려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글로벌 D램 매출 점유율을 합산하면 약 70% 안팎에 이른다. 여기서 생산능력을 더 키웠다가 AI 수요 증가세가 예상보다 둔해지면, 오히려 메모리 가격이 흔들릴 수 있다. 실제로 발표 당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가는 약세를 보였는데, 이는 주로 그날의 해외 증시·수급 요인 탓으로 분석되지만 대규모 설비 투자가 반도체주에 ‘양날의 검’이라는 시장의 경계심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셋째는 실행력이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권마다 대기업들이 수백조 원씩 투자하겠다고 발표해 왔지만 실제로 실현되기는 쉽지 않았다”며, “아직은 계획 단계인 만큼 실질적인 지원과 투자가 이뤄지는지 지켜봐야 한다”고 짚었다. 증권가에서도 이번 계획이 기존 투자와 겹치는 부분이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숫자의 크기만으로 성과를 단정하기 어려운 이유다.
청사진을 현실로 바꾸는 힘
그럼에도 이번 발표가 던지는 방향성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대통령은 이를 “AI 대항해시대, AI 신대륙을 선점하려는 미국과 중국 등의 국가 대항전”으로 규정했다. AI 경쟁이 컴퓨팅 인프라와 전력·인재까지 아우르는 국가 역량의 경쟁으로 옮겨왔다는 진단이다. 이 판에서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메모리 제조 역량과 탄탄한 제조 기반이라는, 쉽게 대체하기 어려운 카드를 쥐고 있다.
관건은 이 4,755조 원이라는 청사진을 실제 성과로 바꿔낼 수 있느냐다. 천문학적 숫자에 취하기보다 전력망과 용수를 제때 공급하고 인재를 길러내며 특정 분야에 쏠린 위험을 분산하는 일이 필요하다. 화려한 발표의 이면에서 이 ‘조용한 인프라’를 얼마나 촘촘히 준비하느냐가 승부를 가를 것이다. 신대륙을 향한 배는 이미 출항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구호가 아니라 항해를 끝까지 감당할 실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