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력이 모든 거리를 비약적으로 줄여놓았다. 비행기는 한나절 만에 대륙을 건너고, 열차는 반나절이면 한 나라의 끝과 끝을 잇는다. 인류사에서 인간이 이토록 걷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시절이 무색하게 사람들은 주말마다 굳이 무거운 배낭을 메고, 멀고 높고 더딘 길을 제 발로 찾아 나선다. 더 빨리 갈 수 있게 됐는데, 어째서 도리어 느려지려 하는 걸까.
편리하고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시대에
사람들은 왜 걸으려 할까?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은 그 물음을 정면으로 받는 책이다. 그는 걷는 일을 두고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라 말한다. 두 발로 걸으면 세상은 더 이상 구경거리가 아니다. 흙의 단단함이 발바닥을 타고 오르고, 오르막의 무게가 종아리에 걸리고, 바람의 결이 뺨을 스친다. 르 브르통은 걷는 이를 일컬어 “자동차를 버리고 세상의 알몸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걷기란 거창한 일이 아니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그 사소한 동작이야말로 인간이 제 존재를 곱씹는 가장 밑바닥의 철학이라는 것이다.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일하고, 차에 실려 집으로 가서, 다시 소파에 파묻히는 우리를 그는 “두 다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이라 부른다. 걷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되자 우리는 걷는 법과 함께 제 몸을 느끼는 법마저 조금씩 잊어버렸다. 잃어버린 그 다리를 도로 찾는 일, 그게 걷기였다.
나는 오랜 시간 무동력으로 여행해 왔다. 자전거, 카약, 그리고 스키까지. 동력의 신속함과 쾌적함을 마다한 건 대단한 신념 때문이 아니다. 느린 만큼 세상이 내 안으로 더 많이 흘러 들어왔기 때문이다. 무동력 여행은 여러 형태였지만, 그 바닥에는 언제나 걷기의 속도가 있었다. 빠를수록 세상은 제 몸을 숨기려 납작해진다. 시속 300km의 차창 밖에서 마을은 이름만 남기고 스쳐 지나간다. 속도는 거리를 줄여놓는 대신 세상을 지운다. 그러나 두 발의 속도에서는 무엇 하나 뭉개지지 않는다. 걷는 사람은 목적지에 빠르게 도착하는 대신, 세상이 제 몸을 천천히 통과하도록 내버려 둔다. 그러니 두 발로 여행한 곳들을 떠올리면 몸이 먼저 기억을 들춘다.
티베트를 여행하며 현지인들과 함께 성지를 순례한 적이 있다.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가 세계의 중심으로 떠받드는 카일라스산. 높이는 6,600m에 그치지만 아직 인간이 그 꼭대기를 밟은 적 없는 미답봉이다. 누구도 감히 신의 정수리를 디디지 않은 것이다. 대신 사람들은 그 둘레를 걷는다. 산을 한 바퀴 돌면 한평생의 업이 씻겨 나간다고 믿으면서 5천m가 넘는 고지대를 걷는다. 가만히 서 있어도 숨이 깔딱깔딱 넘어가는 곳인데, 더러는 한 걸음마다 온몸을 땅바닥에 던지는 오체투지를 하며 나아간다. 걷는 일이 곧 기도가 되는 성스러운 길. 나는 숨이 끊어질 듯한 고산병에 시달리며 그 길을 걸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헐벗은 고원에 부는 바람은 살을 에었고, 머리는 깨질 것처럼 아팠다. 한 발 떼는 데도 온몸의 숨을 다 끌어모아야 했다. 하지만 느려진 걸음 덕분에 카일라스는 제 둘레를 한 자락씩 천천히 펼쳐 보이며 내 안에 스며들었다.
빙하의 얼음, 화산의 잿더미, 밀림의 진창…
발바닥으로, 종아리로, 가쁜 숨으로 몸에 새기다
일본의 야쿠시마에서는 7천 년을 살았다는 삼나무 한 그루를 보기 위해 꼬박 열 시간을 걸었다. 그곳엔 휴대용 화장실 키트를 배낭에 짊어지고 다녀야 하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다. 몸에서 나온 것은 전부 도로 지고 내려와야 하는 숲. 사람이 다녀간 흔적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은 7천 년을 버틴 나무 앞에서 갖춰야 할 마땅한 염치였다. 한 달에 35일 비가 내린다는 섬답게 걷는 내내 날씨가 오락가락했다. 섬 전체가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라 쏟아지는 비를 숲은 스스로 감당했다. 땅은 질척이지 않았고, 계곡물은 바닥의 자갈이 다 비치도록 맑았다. 숲에는 야쿠시마에만 산다는 원숭이와 사슴이 흔했다. 사람을 통 겁내지 않아 길 가운데 퍼질러 앉아 털을 고르다가 사람이 지나가도 흘끔 돌아볼 뿐이었다. 온통 이끼로 뒤덮인 숲을 더디게 걷는 동안 도시에서 굳을 대로 굳었던 마음 한구석도 천천히 풀려나갔다. 나무 앞에 서고서야 알았다. 차로 단숨에 닿을 수 있었다면 그 나무는 그저 큰 고목에 지나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열 시간의 걸음은 7천 년의 시간을 몸으로 더듬는 데 치러야 할 입장료였다.
알프스에서는 눈 덮인 산맥을 일주일에 걸쳐 넘었다. 바닥에 특수한 천을 붙여 오르막도 오를 수 있는 산악스키를 신고서였다. 본디 스키란 눈 덮인 땅을 건너기 위한 옛사람들의 신발이었으니, 그 또한 걷기의 한 형태였다. 그 길에는 하루에 산장이 딱 하나뿐이었다. 날이 아무리 사나워도, 다리가 아무리 굳어도, 그날 묵을 산장에는 기어이 닿아야 했다. 눈앞에 빤히 보이는데도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던 산장. 나를 그곳에 데려다주는 건 첨단 장비가 아니라 오직 두 다리였다. 걷는 동안에는 생각도 말도 다 떨어져 나가고, 오직 다음 걸음을 내딛어야 한다는 사실만이 세상에 남아 있었다. 그 단순함이 좋았다. 걷는 일 하나만으로도 하루가 충만했으니까.
그 밖에도 참 많이 걸었다. 사막의 모래에 발이 푹푹 빠지기도 했고, 빙하의 얼음을 아이젠으로 찍으며 건너기도 했다. 화산의 잿더미를 밟거나 밀림의 진창을 헤치기도 하며. 어떤 길은 한나절로 끝났고 어떤 길은 한 달이 걸렸다. 모든 길은 목적도 풍경도 저마다 달랐지만 한 가지는 같았다. 걸으면 그 풍경이 발바닥으로, 종아리로, 가쁜 숨으로 내 몸에 새겨진다는 것. 그래서 걷고 나면 세상을 구경한 게 아니라 그곳을 한 번 살아낸 기분이 들었다. 동력 위에서라면 무심히 지나쳤을 자리에서 두 발은 매번 무언가를 가져다주었다. 길섶의 흙냄새, 발밑의 경사, 스쳐 간 사람의 눈인사를.
무용함이야말로 빠르고 쓸모 있어야 하는 시대에
걷기가 벌이는 조용한 저항
『걷기 예찬』은 묵직한 이론서가 아니다. 평생 몸을 연구해 온 인류학자가 쓴, 그 자체로 한 편의 긴 산책 같은 책이다. 그는 책 속에서 하이쿠 시인 바쇼와 소설가 스티븐슨처럼 걷기로 이름난 옛사람들을 불러내 독자와 함께 나란히 걷게 한다. 저녁 무렵 길가의 선술집에 둘러앉아 피로와 포도주에 혀가 풀린 도보 여행자들이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 같은 책. 그 느슨한 페이지 사이로 단단한 문장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방심한 독자의 심장을 두드린다.
르 브르통은 걷기를 애써 변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걷기는 애초에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무용한 일이라고 단언한다. 모든 본질적인 것이 그러하듯이. 그는 걷기란 무뎌진 감각을 벼려 세상과 나 사이의 관계를 되찾아 주는 일이라고 친절하게 일러준다. 그러니 무용함이야말로 모든 것이 빨라야 하고 쓸모 있어야 하는 시대에 걷기가 벌이는 조용한 저항이다. 그 저항이라면 나도 평생 가담해 온 셈이다. 나는 다시 짐을 꾸린다. 두 발로만 닿을 수 있는 어떤 길이, 지금도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