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새김예술가의 길을 걷고 있지만, 20대 초중반이던 젊은 시절의 나는 생활을 위해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했다. 공장에도 다녔고 섬유회사에서 재단사 노릇도 했다. 미술에 대한 기초공부도 전혀 안 된 상태에서 의류공장에서 디자인 일도 했다. 그러다 27살 되던 해, 순수 예술가의 길을 가고 싶어 아이러니하게도 도장을 파기 시작했다. 도장 파는 일은 생각 외로 재밌었다. 남들이 도장만 팔 때 나는 작품을 만들자는 생각으로 열심히 매일 새기고 또 새겼다. 그렇게 오가던 마음이 한길로 정해지고 나니, 내게 타고난 모든 끼와 역량을 다 쏟아부어 이룰 수 있는 것이 전각이라는 확신이 섰다. 이 길이 내가 평생을 두고 해야 할 가치 있는 일이며 종합예술로 발전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전각에 미쳐 밤낮 없는 생활을 하기 시작한 지 10여년째이던 1982년 봄, 나는 내 인생의 오늘과 미래를 만났다. 대단한 스승일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니다. 지금의 내 아내를 만난 것이다. 처음 본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내 반쪽을 찾았구나. 나는 곧바로 구애에 들어갔다. 하지만 젊은 시절을 전각과 연애하느라 사람과의 연애 경험도 없고 일방적인 서투른 나의 행동이 그녀의 마음에 들었을 리 만무했다. 그렇다고 내가 그리던 이상형을 놓칠 수는 없었다. 1년여의 끈질긴 구애 끝에 그해 12월,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다. 내 나이 서른여섯. 그녀와 꼭 열 살 차이였으니 주변의 질투어린 시기도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했다. 하지만 아내는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매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서 밤 열 시가 넘어야 겨우 집에 들어왔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듬해 처음으로 아내에게 지금의 나의 미래에 대한 꿈 이야기를 했다. 사실 어떤 답을 들을까 걱정도 됐지만 아내는 한마디 불평 없이 나를 다독여줬다.
그길로 나는 서울의 회정(檜亭) 정문경 선생께 본격적으로 전각예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위해 서울로 이사를 결심했다. 하지만 생활은 힘들기만 했다. 서초동 비닐하우스는 물론이고 계속 이리저리 떠돌았다. 서울생활이 버거워 안산으로 이사했고 아내 혼자 아이들의 양육을 책임졌다. 서울 작업실에 묻혀 한 달에 몇 번, 아니 1년에 두 번 집에 들른 적도 있었다. 그래도 내 아내는 불평 없이 예술가로서 나의 성공을 빌어주고 응원해줬다.
‘전각’이란 단어조차도 잘 알지 못하는 당시 사회분위기 속에서 나를 믿고 지켜주는 아내 덕에 나는 밤을 새며 더욱 정진했다. 예술의 본령인 남이 가지 않는 길을 새롭게 열어보겠다는 생각과 나를 믿어주는 내 아내를 위한 당찬 꿈은 시작된 것이다.
그 후 알려진 것처럼 나는 전통전각에서 전각화, 아날로지탈(아날로그+디지털) 그리고 지금의 새김아트(relief art) 장르를 만들었다. 몇 개의 굵직한 상을 연달아 수상했고 작품세계도 조명받기 시작했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삼족오 직인 제작과 2008년 베이징올림픽 애니메이션 타이틀 제작(MBC), 2010년 서울 국제드라마 어워즈 시상식의 예술감독. 그리고 2011년에는 대학교 전임교수로도 임용됐다.
오늘의 나와 미래의 나. 지금 주목받는 새김아트는 30년 전 내 인생의 반쪽이며 내 인생의 전부를 완성해준 아내를 만나는 순간, 그 한순간에 만들어졌다고 믿는다. 나의 예술은 그렇게 사람과 사람이 만나 생기는 에너지와 믿음으로 완성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지금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의 사이에 집중한다. 순간을 순간으로 지나칠 수 없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