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에 문득 길 잃은 미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길을 잃은 게 아니라 길이 곧 집이었습니다. 집 밖의 그 어느 곳으로 향하는 길이 있으리라 믿었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모든 길이 곧 집이었지요. 집과 길은 자웅동체의 한 몸이었습니다. 점과 점을 이으면 선이 되듯이 집과 집을 이으면 그게 바로 길이었지요.
21세기 현대인들에게 집은 무엇인지요? 일평생 집 한 채 장만하기 위해 몸부림치다 죽어 두 평의 집, 무덤 하나 가지는 게 인생의 전부라면 길은 어디에 있는지요? 집과 무덤으로 곧바로 향하는 무한질주의 행로 속에 과정으로서의 길은 적당히 생략되어도 좋은지요?
과정으로서의 길을 생략하고, 길이 집이라는 사실을 외면한 채 집착과 욕망으로서의 집만 존재할 때 오히려 우리는 자주 길을 잃게 됩니다. 잃은 길도 길이요, 좌불안석의 집도 집이라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고 앞만 보고 달려가다 보니 더더욱 혼돈의 길이 아닌지요.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결과와 목표만을 추구하며 살다보면 그 화사해 보이던 결과의 꽃마저 바로 죽음의 조화요, 무덤 자리의 할미꽃일 뿐입니다.
그리하여 이 가을에 벌초를 하고 성묘를 하는 것이지요. 벌초와 성묘는 감사와 반성과 참회의 한 양식입니다. 이 세상을 물려준 조상에 대한 감사의 큰절이자 무언가 잘못 살아온 날들에 대한 참회요, 새로운 다짐의 소중한 의식이지요. 바로 여기에 인생살이의 핵심이 있습니다.
살면서 너무나 힘들고 앞길이 캄캄할 때 우리는 소중했던 이들의 무덤을 찾아갑니다. 적당히 슬프고 적당히 힘들 때는 무덤을 찾지 않지요. 왜 그럴까요? 평상시에는 정신없이 잊고 살다 집에서 무덤으로 이어지는 인생, 그 과정의 실체를 바로 보는 계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죽은, 그래서 더 소중했던 이들이 행여 우리의 삶을 통째로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섞인 자기 성찰, 이것이 오히려 삶을 풍성하게 합니다. 자기 자신의 삶을 객관화시켜 보는 좋은 기회로 작용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리하여 이 가을의 나그네로서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문득 삶이 팍팍하거나 슬프거나 쓸쓸하거나 외롭거나 절망적일 때 가장 가까운 누군가의 무덤을 찾아가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친족이나 친구가 아닌 잘 모르는 이의 무덤이라도 좋습니다.
그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다 무슨 사연으로 죽었는지 알 수 없지만 잘 모르는 이의 무덤 앞에 소주라도 한 잔 올리고 큰절을 해보기를. 그리고 또 누구인지 잘 모르지만 그에게 고해의 상담이라도 해보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무덤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오던 길보다 더 환해지고,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설사 원수라 하더라도 가까운 이들을 위해 또 무엇을 해야 할지 마침내 알게 될 것입니다.
바로 집과 무덤 사이의 무한한 공간과 시간의 길이지요. 그대가 오늘 지금 이 순간에 하나 둘 찍고 있는 발자국들의 화석, 그것이 바로 21세기의 타임캡슐이자 희망의 길입니다.
그대의 발자국이 더욱더 선명해지는 가을 저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