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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내 인생의 결정적 순간나를 찾는 대가의 전화 한 통에 소리가 운명이 됐다
안숙선ㆍ명창,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2012년 12월호

나는 판소리의 고장 남원의 국악家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집안 어른들의 소리를 자연스레 듣고 익힐 수 있었다. 외가 쪽으로 대금산조 인간문화재인 강백천 명인, 판소리 <흥보가> 인간문화재 강도근 명인, 가야금의 대가 강석촌 명인 등이 있으니 집안 분위기가 어땠겠는가. 다른 이들처럼 레슨 선생님을 찾아다니는 수고는 없었지만, 어른들 손에 이끌려 공부한 것이기에 내 길에 대한 의문으로 가득했다. “춤 배워라, 소리 배워라, 장단 배워라, 농악 배워라?”는 말은 숱하게 들었지만 배운 것으로 무엇을 해야 되는지는 아무도 일러주지 않았던 것이다.


지방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문화’라는 게 우리 옆에 가까이 있지 않았던 시절, “문화가 삶의 질을 높인다”는 것은 그야말로 배부른 소리였다. ‘문화 공간’이라고는 좌석도 없이 덩그마니 스크린이 걸린 극장이 전부였다. 야외에서 별을 보며 소리를 하고 추운 겨울에는 관객들과 함께 장작불을 쬐어 가며 공연을 했던 시절이다. 지금 생각하면 꽤나 낭만적인 풍경이지만 그때는 참 을씨년스러웠다. 아무리 소리 공부를 해도 앞날을 또렷이 그려볼 수 없어서 ‘나도 공부나 기술을 배워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고민도 했다, 


그러던 열일곱에 운명의 시간이 찾아왔다. 나를 찾는 전화 한 통에 소리를 해야 하는 내 운명이 결정된 것이다. 전화의 주인공은 고 만정 김소희 선생님. “네가 소리하는 것을 직접 보고 싶다”는 대가의 부름에 기나긴 완행열차를 타고 난생 처음 서울 길에 올랐다. 서울에서 선생님을 뵙고 남원으로 돌아오는 길, 대가를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가슴이 벅찼다. 그리고 ‘이제, 다른 생각 않고 소리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서울에 아무 연고가 없던 나를 선생님이 보살펴주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서울생활을 시작하고 다시 한 번 기회가 왔다. 국제관광공사에서 운영하던 워커힐 호텔의 공연장에서 매일 공연을 하며 생활을 이어나갔는데, 공연을 펼치며 단원들까지 가르쳐야 했기에 피로감이 극심했다. 소리에만 의존할 게 아니라 가야금 병창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고 박귀희 선생님을 찾아갔다. 박귀희 선생님은 음악계에서 김소희 선생님과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분이다. 선생님은 흔쾌히 나를 맞아줬고 음악뿐 아니라 생활태도와 외모, 사람 대하는 것 등 갖가지 ‘인생 수업’을 해주셨다. 집안에선 잔소리 한번 듣지 않은 내게 두 선생님은 주문도 많았고 잔소리(?)도 많이 하셨다. 철없는 제자는 지금에서야 느낀다. 국악계의 한 사람을 키워내기까지 선생님들이 얼마나 극진한 정성을 기울이셨던가를….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결혼을 앞둔 때에 내 남편을 불러 두 분은 거듭 이렇게 당부하셨다고 한다. “각오를 단단히 해라. 숙선이는 계속 공부해야 되고, 공연해야 되는 사람이다. 우리 음악을 짊어지고 갈 사람이다”라고. 내가 가는 길에 흔들리지 않게 두 선생님이 양손을 잡아주신 것이다.


박귀희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전수생으로 발탁됐고 1979년에는 공연활동을 정상화하기 시작한 국립창극단에 정식단원으로 입단도 했다. 대극장, 소극장, 야외무대. 내가 꿈에 그리던 공간이 바로 거기 있었다. 국립창극단원 시절, 발레단과 오페라단 등 다양한 공연을 접하며 내가 하는 우리 음악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도 얻게 됐다.


몇 백 년 동안 천재적 음악가들의 창작에 구전이 얽힌 공동작업으로 후대에 전해진 것이 판소리다. 판소리 한 바탕에는 ‘작가 미상’이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사람들의 작품이 녹아 있다. ‘이 신성한 유산을 어떻게 하면 대중들에게 더 가깝게 전달할까?’가 내 남은 고민이자 소명이다. 하지만 크게 걱정은 하지 않는다. 두 분 선생님이 내게 주셨던 마음 그대로 학생들을 만나고 우리 소리를 전한다면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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