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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내 인생의 결정적 순간상상 속 동작을 ‘여1’로 완성한 순간 최고의 환희 느끼다
여홍철 경희대 스포츠지도학과 교수 2013년 01월호

어릴 적 내 꿈은 무협영화의 주인공처럼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시절 한창 인기 절정이던 프로야구의 팬이기도 했다. 초등학교에서 방과 후 클럽활동을 선택할 때 야구부가 없는 게 얼마나 안타깝던지…. 대신, 체조부에 들어오면 매일 빵과 우유를 먹을 수 있다는 꼬임에 넘어가 꼬마 여홍철은 처음 체조와 만나게 됐다. 낯설기만 하던 ‘체조’라는 운동이 나와 꽤 궁합이 맞았던 모양이다. 가끔씩 공중에서 몸을 비틀고 몇 바퀴 회전해 멋지게 착지하는 동작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곤 했다. 십몇 년 후 상상 속의 그 동작은 내 이름을 딴 ‘여1’이라는 나만의 고급기술로 인정받고 올림픽 무대에서 펼쳐 보이게 된다.


하지만 고비는 너무 이르게 찾아왔다.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뼈 사이의 물렁뼈가 녹아내리는 골수염 진단과 함께 “경과가 좋지 않으면 팔을 절단할 수도 있다.”는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 그 사실을 감당하기에 나는 너무 어렸다. 머릿속에선 화려한 동작들을 마스터하며 멋진 체조선수로 훨훨 날고 있는데 2년 6개월 동안이나 꼼짝도 못하고 공백기를 가져야 했다. 하지만 그때도 운동을 그만둔다는 생각은 막연하게라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고열 속에서 녹아내리던 뼈가 굳기 시작했고, 관절에 무리가 덜 가는 뜀틀을 선택하며 다시 운동을 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매 시기마다 반드시 이뤄야 하는 나만의 목표를 설정했다. 그리고 한눈팔지 않고 오직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 왔다. 중학생 시절 체조부 감독님이셨던 최기동 선생님은 이러한 목적의식을 강하게 심어주신 분이다. 그리고 골수염으로 인해 남들보다 더 예민한 컨디션으로 악조건 속에서 운동해야 했기에 내게 목표는 더 간절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지금도 나는 골수염을 앓고 있다). 운동선수라면 누구나 태극마크를 꿈꾸고 전국체전 무대와 올림픽 무대에서 우승하기를 꿈꾸지만 모든 선수가 그 영광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돌이켜보면 나는 운이 참 좋은 사람인 게 분명하다. 내가 설정했던 목표의 70% 정도를 이뤘으니 말이다.


크고 작은 그 목표들 중 어느 것 하나 간절하지 않은 목표는 없었다. 어느 것 하나 내 체조 인생에 있어 결정적이지 않은 목표도 없었다. 꿈에 그리던 국가대표가 되기까지 꿈에 그리던 올림픽 메달을 따기까지 그렇게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며 성장해 왔다. 그렇기에 결정적인 순간을 꼽으라면 열 손가락도 모자란다. 수많은 장면이 동시에 떠오른다. 하지만 유독 환희에 찼던 순간과 유독 아리게 남는 순간은 하나씩 있다.


1990년 북경 아시안게임 출전을 코앞에 두고 그만 큰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출전을 포기하고 태릉선수촌을 빠져나오며 얼마나 서러움에 북받치던지…. 다시는 내 앞에 다가온 기회를 허무하게 흘려보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가장 환희에 찼던 순간은 바로 ‘여1’을 처음으로 성공시킨 순간이다. 1993년 대학교 3학년 때 일어난 일이다. 여느 때처럼 연습을 하다가 뜀틀 위에서 몸을 틀어 뒤로 세 바퀴 정도 휙 돈 것이다. 내게 기적이 일어난 거다. 그때의 환희란 도저히 말로 설명 못 한다. 누군가는 “기술을 처음 성공시킬 때의 기분은 마약했을 때 느끼는 쾌락의 열 배”라고 하던데, 마약을 해 본 적이 없어 정말 열 배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도 그 순간을 떠올리면 아찔할 정도로 흥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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