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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허남웅의 신나는 시네그래서 영화가 필요합니다. 이 엉터리 같은 세상에서는
김세윤 방송작가 2013년 01월호

18년은 긴 세월입니다. 신생아실에 누워 꼼지락거리던 갓난아기가 커서 대학수능시험 치를 정도의 세월. 새 대통령을 뽑기 위해 네 번이나 기표소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만만치 않은 세월. 영화 <컨빅션>은 그 긴 세월을 담아냅니다. 한 사람의 잘못된 확신(conviction) 때문에 유죄 평결(conviction) 받고 감옥에 갇힌 남자를, 다른 한 사람의 굳은 신념(conviction)으로 구원하기까지 무려 18년이나 필요했던, 어느 믿기 힘든 실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자, 얘기는 이렇습니다. 케니(샘 록웰분)는 껄렁껄렁한 사람이었어요. 어릴 적엔 자주 좀도둑질을 했고 커서는 종종 쌈박질을 했습니다. 그러니 마을 주민 한 명이 끔찍하게 살해당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제일 먼저 그를 의심할 만도 합니다. 하지만 케니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요. 도둑질도 하고 쌈박질도 하는 사람인 건 맞지만, 사람을 죽일 만큼 잔악무도한 위인은 아니거든요.


그런데도 경찰은 처음부터 케니를 살인범으로 지목합니다. 실적 높여 빨리 승진하고 싶은 낸시 테일러라는 여자 경찰이 특히 그를 의심합니다. 잘못된 확신(제목으로 쓴 ‘conviction’이라는 단어의 첫번째 뜻은 ‘확신’입니다)으로 케니를 법정에 세우고,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범인의 혈액형이 케니의 혈액형과 같다는 게 결정적인 증거라고 주장해요. 껄렁껄렁한 케니의 평소 행실을 부각시켜 배심원들 마음을 흔들어 놓는데도 열심. 결국 케니는 유죄 평결(제목으로 쓴 ‘conviction’이라는 단어의 두 번째 뜻은 ‘유죄 평결’입니다)을 받고 감옥에 갑니다. 종신형. 죽을 때까지 집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뜻이지요.


다행히 케니에겐 여동생 배티 앤(힐러리 스웽크분)이 있었습니다. 오빠가 결백하다고 믿는 그녀는 잘못된 수사결과를 바로잡기로 결심해요. 방법은? 변호사가 되는 것. 그래서 오빠를 직접 변호하는 것. 두 아이의 엄마이자 평범한 가정주부는 오직 오빠를 위해 로스쿨에 입학했고, 아르바이트와 집안 살림에 지쳐도 공부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어렵게 변호사가 됐고 드디어 오빠 사건을 맡게 되지요.


하지만 이미 세월이 많이 흘렀고 관련 자료는 폐기됐으며 무엇보다 껄렁껄렁한 좀도둑의 결백을 믿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내 손으로 모든 잘못을 바로잡고 말겠다는 신념(제목으로 쓰인 ‘conviction’이라는 단어의 세번째 뜻은 ‘신념’입니다)을 버리지 않고 악착같이 사건에 매달린 동생. 결국 오빠가 풀려납니다. 종신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18년 동안 갇혀있던 오빠가, 마침내 누명을 벗고 가족 품으로 돌아옵니다.


이 영화 같은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진 건 2001년입니다. 언론을 통해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된 사람들은 두 번 놀랐죠. 이렇게 부실한 증거만으로 한 사람을 18년 동안 감옥에 가둘 수 있다는 사실에 한 번, 그리고 단지 오빠에 대한 사랑만으로 한 사람이 18년 동안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희생할 수 있다는 데 또 한 번. 하지만 우리가 신문 기사를 읽을 때 찾아오는 그런 종류의 놀라움은 금세 잊히고 말지요. 당사자들에겐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은 18년 세월이 남들에겐 고작 하루짜리 가십으로, 술자리 얘깃거리로 소비되고 마는 게 현실입니다.


그래서 영화가 필요합니다. 기사가 미처 다 담아내지 못한 그들의 분노, 슬픔, 용기, 희생, 인내, 좌절, 절망 그리고 다시 희망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도록, 그래서 지금도 우리 주변 누군가의 인생을 망가뜨리고 있는 온갖 부조리와 불합리에 내 일처럼 분노하며 함께 아파할 수 있도록, 우리 가슴 깊이 파고들 100분의 드라마가 필요합니다. <컨빅션>처럼 말이지요.


이 영화는 참 성실한 영화입니다. 극적인 사건 사고를 부러 지어내기 보다는 성실하게, 착실하게, 실제 사건의 기승전결을 차근차근 따라갑니다. 유난히 도드라지는 캐릭터를 만들기 보다는 주요 등장인물 모두에게 공평한 카메라를 들이댑니다. 더 드라마틱하게, 더 자극적으로 찍어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특출난 ‘영화’를 만들겠다는 야심보다는 가능한 이 특별한 ‘실화’에 충실하겠다는 다짐이 엿보입니다.


연출이 새롭지 않다는 이유로 평론가들은 후한 점수를 주지 않았죠. 하지만 때론 새로운 연출보다 ‘의로운’ 연출이 미덕일 때가 있습니다. 평범한 만듦새 사이로 배어나오는 어떤 비범한 진심 같은 게 느껴지는 영화가 있습니다. <컨빅션>이 그렇습니다.


힐러리 스웽크와 샘 록웰, 정말 연기 잘하는 두 배우 덕분에 100분 내내 ‘영화’가 아니라 ‘실화’를 보게 됩니다. 그들이 연기하는, 아니 직접 살아내는 케니와 베티 앤, 두 사람의 인생이 우리에게 묻고 있어요. 당신은 누군가를 위해 18년을 헌신할 수 있습니까? 어떤 신념을 18년 동안 포기하지 않을 자신, 있습니까? 당신이 케니라면, 당신이 베티 앤이라면, 이 엉터리 같은 세상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이건 단지 영화일 뿐이라고, 다른 나라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라고, 정말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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